문화와 역사
2010년대
남해문협 제11집
상세내용
◈남해문협 제11집 ◈
▶ 은종 목걸이
어느 분이 이랬을까?
한밤중에 귀한 인삼을 대문간에다가 살짝 놓고 사라지다니.....
불쌍한 사람들 집만 짚는 걸로 봐 짐작이 갈 듯한데도 깜깜합니다.
이수수께끼의 매듭을 풀어보려고 나는 나름대로 애를 무척 썼습니다.
여러 밤을 뜬눈으로 새었으나 아직 가닥조차 못 잡았습니다.
혹시 떨어뜨린 것을 내가 가로챈 것 아닐까?
그렇다면 주인이 가만있을 리 없고 엄청난 값을 물어주어야 될 판입니다. 아무튼 이 인삼 뿌리를 썰어 나물로 해 잡순 어머지가 기운을 차려 우유 배달을 다시 시작한 것까지는 퍽 다행한 일입니다.
새로 우유 주문하는 집도 불어났습니다.
그러하나 행여 공짜 인삼으로 마목이 들어 좋잖은 일이 터질까 봐 조마조마합니다.
꼭 몰래 훔쳐 먹은 것인 것 같아 어머니나 나나 속이 영 편치를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더덕 뿌리로만 여겼는데 비싼 인삼이었음을 알아챈 어머니의 당황해 하는 낯빛은 아직 좀체 지워지지 않습니다.
"준우야. 네가 이런 거짓말을 하다니......"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친구 어머니가 더덕 뿌리를 주더라 했었지."
"예."
"다 꾸며낸 말이더구나"
어머니는 규만이 어머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 모양입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미리 말을 맞추는 건데.....
"내가 먹을 인삼 구하려고 너가 신문 배달하다니...., 이 애미 속이 아리지 않고....."
어머니의 서글퍼 하는 표정을 보고 나는 아무런 대꾸도 못했습니다.
훔친 것은 아니지만 거짓말로 둘러댔던 것입니다.
대문간에 있길래 거둬 왔다고 하면 어머니가 언짢게 여길 것 같아서입니다.
내가 그렇지 않다고 거듭 말했지만 어머니는 돌아누우며 눈물이 글썽해졌습니다.
"다 부모 잘못 만난 탓이지. 너가 무슨 잘못이니....."
이 말씀이 더욱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그러나 올 여름방학 한 철은 신문배달을 계속할 작정입니다.
한 달을 채워야 월급도 받을 수 있을 뿐더러 다음 배달꾼에게 신문 보는 집을 모두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도 어머니의 오해를 푸는 길이 열릴 것도 같아서 더욱 일찍 나섰습니다.
대문간에다 인삼을 던져 놓고 간 손을 잡고 싶었습니다.
그가 실수했다면 나타날 것입니다. 분명 그러할 겁니다.
아, 정말 짐작한 대로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릴 줄이야......
그 인삼 뿌리를 우리 집 대문간에 놓고 간 사연을 낱낱이 내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나는 그날 새벽 신문을 옆구리에 잔뜩 끼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리고는 나머지 10부의 신문은 산동네에다 그저 뿌리려고 언덕배기를 채 올랐습니다.
받는 사람이 한자를 읽을 줄 모르면 사진만 봐도 신문은 볼 만 하다 여겨서입니다.
재국이네 집에 던져 놓고 막 돌아서는데 뜻밖에 누르스름한 덩치 하나가 후다닥 골목길로 사라지는 것이었고 막 얼쩡거린 자리에는 싱싱한 잎이 달린 인삼 한 뿌리가 놓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슴이었습니다.
사슴은 이튿날에도 마주쳤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앓고 있는 사람이 있는 집이거나 독거 노인집만 골라서일까요.
그래서 우리 마을 누구네 집에 중환자가 있는 줄은 알게 되었고, 나는 신문 배달꾼이 아니라 이 고마운 사슴을 만나러 새벽길을 달리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사슴은 이제 나와 맞부딪쳐도 놀라거나 꽁무니를 빼지 않았습니다.
사슴도 힘이 드는지 가끔 대문간에 주저않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드디어 나는 사슴을 끌어안고 목에다 은종 목걸이를 걸어 주었습니다.
사슴의 눈이 유리알처럼 반짝이다가 눈물이 그렁해졌습니다.
"이 은종을 어디에서...."
나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크리스마스 장식품이었다는 말은 못했습니다.
"북극에서 썰매 타고 올 적 우리도 은종을 목에 걸고 있었지....."
"아, 산타 할아버지와 같이 왔었구나, 언제?"
"오래된 겨울이었어"
"왜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사슴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더 묻지 않았습니다.
나는 꿈결에도 사슴이 딸랑거리는 은종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 혼자만 들을 수 있는 맑은 은종 소리에 너무 행복했습니다.
내가 신문 배달을 그만두지 못하는 까닭은 새벽마다 은종소리를 내는 사슴을 만나려는 것인데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내가 신문 배달을 한 지 일 년이 넘었을 즈음 드디어 사슴이 사는 데를 알아내었습니다.
배달을 일찍 끝내고 사슴을 기다렸다가 뒤를 살살 밟았습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려고 단단히 별렀습니다.
언제나 사슴은 날이 훤해지자마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사슴은 바로 광보당 한약방 간판 속에 들어가 터억 버티고는 나를 모른 척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슴은 내가 목에 걸어준 은종을 자랑스럽게 달고 있어 나는 단박에 알아챘습니다.
광보당 한약방 간판의 사슴 그림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렸는데 그때는 은종 목걸이는 달지 않았습니다.
그러해도 나는 그 사슴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사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무섭고도 슬픈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슴을 사냥한다는 소식이 반상회보에 실린 것입니다.
한밤중에 불쑥 튀어나와 사람을 놀라게 하고 차의 앞을 가로막는 짐승을 몰아다 한군데에 가두거나 숨통을 끊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은종을 딸랑거리며 가난한 환자에게 인삼을 나르고 있는 사슴이라는 것을 나는 단박에 알았습니다.
내가 어머니와 함께 경찰서에 가서 매달려 보았지만 아무소용이 없었습니다. 골목마다 민방위대가 쫘악 깔렸고 공익요원은 길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한바탕 총소리가 울리고 바람이 창문을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마을에 어슬렁거리거나 떠돌던 개, 고양이들은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는 구석에 숨어들었습니다.
나는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비가 그치자 부리나케 광보당 한약방에 뛰어갔습니다.
아, 사슴은 다행이 붙잡히지 않고 제자리인 간판 속에 돌아와 있었는데 매우 슬픈 눈빛이었습니다.
내가 걸어준 은종은 잃은 채였습니다. 목덜미에 구멍이 뻥 뚫렸고 간판 아래 땅바닥에는 꽃이파리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사슴이 흘린 핏자국임이 분명합니다.
나만이 아는 일이라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슴이 다시 새벽의 골목길을 누빌 수 있기를 바라느라 두 손을 싹싹 비볐습니다. 어서 상처가 아물기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문방구에 달려갔습니다. 사슴에게 걸어 줄 은종 목걸이를 사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