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2020년대
난곡사 창간 100주년 기념학술세미나
상세내용
◈ 난곡사 창간 100주년 기념학술세미나 ◈
▶이재 백이정 선생
이재의 성은 백씨로 대대로 남포에서 살았다. 시조의 휘는 우경으로, 관직은 신라 대사도였으며, 고려에 이르러 휘 창직이라는 분은 시중을 지냈으며 휘 탁을 낳았는데 벼슬이 병부 시랑으로 공의 6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여주로 한림학사를 지냈으며, 조부의 휘는 경선으로 좌복야를 지냈다. 부친의 휘는 문절로 고종조에 이부 시랑, 국자 좨주, 대사성, 보문각 학사 등을 지냈다. 호는 담암으로 세 조정의 명신이었으며, 시호는 문간이다. 부인은 성주 이씨로 참봉 이세주의 따님이며, 1274년(고종 34) 9월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박하고 돈후하며 삼공과 육경의 기량을 지녔다.
일찍이 문정공 권부, 문희공 우탁 선생과 함께 회헌안선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성리학으로 자임하였다. 당시 나라에서 반역자를 치고 죄를 물은 지 20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선비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활과 화살을 잡았으며 독서하는 자가 열에 한둘도 안 되어 육경의 글은 겨우 명맥을 잇고 있었다. 회헌공이 성묘를 수리하여 공씨를 종주로 삼자, 우수한 품행을 지닌 여러 현인들이 경전에 통하고 옛것에 해박하게 되는 데 힘써서 불교의 비루함을 씻었다. 1284년(충렬왕 10) 권단이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취사하였는데 권한공, 김원상, 최성지, 채홍철 등과 함께 급제하였다. 1298년(충렬왕 24) 원나라가 사신을 보내 세자를 왕으로 삼았는데, 바로 충선왕이다. 8월 충선왕을 불러 입조하라고 하니, 충선왕이 원나라로 갔다. 공은 숙위로 왕을 따라가서 연경에서 10여 년간 머물다가 정주의 전서를 많이 가지고 돌아와 동문 네다섯사람과 날마다 서로 강의하고 전수하여 우리나라 학자들이 비로소 성리학이 있는 줄을 알았다.
1314년(충숙왕1)에 여러 차례 벼슬하여 첨의평리 상의도감사에 이르렀으며 상당군에 봉해졌다. 1323년 12월에 졸하니, 향년 77세였다. 충숙왕이 문헌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인은 안동 김씨로, 판삼사사 문영공 김순의 따님이며 충렬공 김방경의 손녀이다.
『고려사』 에 의하면 백이정이 1298년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의 연경에 10년 동안 체류하면서 원나라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돌아와서 이제현, 박충좌를 가르쳤다. 그러나 안향(일명 1243~1306)은 그보다 9년 전 1289년(충렬왕 15)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었는데 이때 새로 간행된 『주자전서』를 보고 주자학에 접하였다고 하며, 그 후에도 백이정과 같은 해에 원나라에 가서 주자학을 연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리학 도입기의 사승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백이정으로부터 이제현 → 이곡 → 이색으로 이어지고, 이색의 문인으로는 정도전·이승인·권근·정몽주·길재·변계량 등이 있다.
▶ 익재 이제현 선생
본관은 경주. 초명은 이지공, 자는 중사, 호는 익재·역옹, 아버지는 검교정승 이진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숙했고 글을 짓는 데 있어서 비범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1301년(충렬 27) 4월 성균시(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5월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 해에 당시 대학자인 권보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과 연경궁녹사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 해에 사헌규정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충신왕 3)에는 전교시승과 삼사판관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 안렴사에 선발되었다. 1314년(충숙왕 1)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으로 가서 만권당에 머물게 됨으로써 원나라 생활이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를 즐겼다. 이때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익재를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익재는 만권당에 출입한 조맹부, 원명선, 장양호, 우집, 탕병룡, 주덕윤 등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익재의 원나라 생활과 관련해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의 명산 아미산에 치제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의 보타사로 강향하기 위해 행차할 때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의 타사마에 다녀왔다. 이 세번의 걸친 여행은 익재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320년(충숙왕 7)은 익재의 생애에 있어 또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해, 성균좨주 ·판전교시사·선부전서를 역임하였다. 같은 해 6월 과거를 주관하면서 시부를 폐지하고 책문으로 시험하였으며, 7월 지밀직사사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의 호를 받았고 9월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익재는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 반대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서 토번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이 타사마로 옮겨진 데에는 익재가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24년 2월 밀직사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 추성양절공신 정당문학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충숙왕과 충혜왕 부자가 중조(왕이 거듭하여 즉위하는 형상)하는 어지러운 때를 당했울 때는 익재의 활동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1339년 조적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충혜왕을 쫓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하고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에 눌러 두문불출했는데, 이 기간 동안에 『역옹패설』을 저술하였다.
익재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1342년(충혜 복위3) 6월 조적 난 때 호종한 공으로 김해군으로 1등공신에 봉해졌으며, 1344년 4월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해진 정치 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해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12월 충묵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훗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11월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도첨의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공민2) 5월 김해군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 등 35인을 등과자로 선발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기철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11월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이듬해 5월 치사하였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도 남쪽으로 달려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하였다. 1367년(공민 16) 7월 세상을 떠났다.
▶치암 박충좌 선생
본관은 함양, 자는 자화, 호는 치암. 조부는 박지빈이며, 부친은 군부총랑을 지낸 박장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이재 백이정 선생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우고 돌아왔을 때 익재 함께 제일 먼저 가르침을 받았다.
치암 연보에 의하면 “1314년(선생 28세) 이때에 정주학이 중국에 행해지기 시작하였으나 우리나라에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백이정이 원나라에 있다가 이를 배워 우리나라로 돌아오자, 선생이 제일 먼저 사사하여 전수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332년(충숙왕 복위1) 전라도안렴사로 나갔을 때 폐신 박련이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 하는 것을 막다가 그의 참소로 무고를 당하여 해도로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감찰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빙자하여 취임하지 않았으며, 또다시 예문응교에 제수되어 경상도염세를 감독하게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내서사인·밀직제학·개성부윤 등을 거쳐 함양부원군에 피봉되었다. 1344년(충혜왕 복위5)에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 이천과 함께 진사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았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양천군 허백과 함께 판전민도감사가 되었고, 이어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왕에게 『정관정요』를 시강하여 상을 받았다.
1354년(충목왕 1) 정방을 다시 설치할 때 찬성사로 그 제조관이 되었으며, 이어 판삼사사에 올라 순성보덕협찬공신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온화하고 검약하며 일생동안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예얀의 역동서원에 봉황되었다. 시호는 문제이다.
▶ 난계 이희급 선생
난계 이희급 선생은 1553년(명종8) 지금의 남해 이동면 난양리에서 부친 이인충과 모친 진양 하씨 슬하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이며 자는 중사호는 난계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해 학문이 출중하여 23세(1576)때 생원 진사로 성균관에 입학을 했고 29세(1582)때는 남해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25) 개령(지금의 문경) 현감에 올랐고 함양군수와 경상도사 등을 역임했다. 문과 급제자이지만 나라의 환란을 당해 앞장서 왜적과 싸우다가 진도 벽파진 전투에서 순절했다. 이 공을 기려 1605년(선조35) 공신녹권이 내려졌으며 이녹권은 현재 경남 문화재 자료 제 637호로 등록되었고 남해유배 문학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