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2020년대
2022 남해동학 학술조사보고회 및 문화예술제 자료집
상세내용
◈ 2022 남해동학 학술조사보고회 및 문화예술제 자료집 ◈
▶ 남해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남해에는 선구의 김성재, 야촌마을의 정용태, 서상의 박용필, 물건의 김일문 등이 1891~3년 사이에 동락을 받아들여서 교세를 진작시키고 있었다. 1894년 3월 20일 전봉준이 무장에서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가 함께 기포하였다. 1월의 고부기포를 조사하기 위해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가 진상조사보다는 동학도의 재물을 약탈하고 고부군민을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4월 초 진주 덕산의 백도홍이 호남에 호응해 기포하였으나 진주영장에 의해 체포되어 덕산장에서 4월 15일경에 참수되었다. 동학도들은 백도홍의 참형에 반발해 수천 명이 진주관아를 찾아 항의하였다. 진주관아의 집결이 손은석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남해의 정용태 등도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남해의 동학도들은 서부 경남의 동학도와 연합하면서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4월 7일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하고 남행을 감행한 동학혁명군은 장성의 황룡촌에서 경군을 격파하고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문현과 화약을 체결하고 진주성을 빠져나왔고 이후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해 활동하였다. 남해는 여수와도 인접해 있어서 서상항을 통해 전라도의 동학농민혁명의 상황도 전해듣고 있었다.
당시 여수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김인배는 영호 동학군을 평선해 호남과 영남에도 동학농민혁명을 확산시키려 하였다 전라도와 인접한 하동에서는 7월 초에 광양 동학혁명군의 도움을 받아 하동읍에 ‘영남의소’를 설치해 서부 경남으로 동학농민혁명을 확산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동부사 이재연은 화개마을의 김진옥 등 지리산의 포수를 모집해 영남의소를 파훼하였다.
하동의 동학도들은 이들에게 쫓겨 광양으로 피신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인배는 7월 15일 남원에서 전봉준과 김개남 등이 수만의 동학혁명군을 모이는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하동 공격을 연기하였다.
8월 25일의 남원대회 직후 여수로 돌아온 김인배는 하동 점령을 위해 각접에 8월 28일 섬거역에 집결하라고 통문을 보냈다. 섬거역에 집결한 1만명의 동학군은 8월 30일 하동읍 건너편인 광양군 다압면으로 진군하였다. 하동부사 이채연은 전라도 동학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겁에 질렸다. 당황한 그는 원병을 청하러 경상감사를 찾아간다는 구실로 달아났다. 부사가 달아나자 민포대장 김진옥은 다급히 통영으로 달려가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대완포 12문만 얻어오는 데 그쳤다. 김진옥은 악양·화개·적량·하동읍 등에서 수천 명의 민병을 동원하였다. 섬진강 서쪽 강가에 동락군 대부대가 나타나자 민포군들은 북과 징을 울리고 총포를 쏘아댔다.
동학군은 9월 1일 아침에 도강작전을 벌였다. 주력부대는 하동읍 북서쪽 상류에 있는 섬진관 나루터를 건너 만지등으로 건너 화심리와 두곡리 일대를 장악하였다. 강을 건넌 후 일부는 하동읍 바로 뒤에 있는 해량 포구를 공격하였다. 해량 포구의 민포들은 얼마간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철수해 버렸다.
한편 광양 진월면 망덕진에서 출발한 천여 명의 선단은 조수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하동읍 남쪽에 상륙하였다. 대기하고 있던 하동의 여장협 동학군과 합류하여 읍의 남쪽을 공격해 들어갔다. 화심리와 두곡리에 진격한 동학군은 점심 후 안장봉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예상외로 안장봉이 가팔라 중턱까지 올라가자 날이 어두워졌다. 동학군의 공세에 민포들은 대포를 겨우 발사하였으나 효과는 없었다. 이날의 전투에서 동학군은 삼면에서 포위하여 민포군을 완전히 고립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새벽부터 동학군은 총공격에 나서 저녁 무렵에 주봉을 점령하고 하동읍으로 들어오자 관군과 민포들은 달아났다. 동학군은 이튿날인 9월 3일 민포군의 거점인 화개로 들어가 탑리부터 법하리의 민포군의 집을 불 지르고, 악양과 적량 일대 민포군의 집을 찾아 불태워버렸다. 하동을 점령한 영호대접주 김인배는 9월 10일경부터 전라도의 흥양, 순천, 광양지역 일부 병력과 하동지역 동학군을 진주 쪽으로 이동시키면서 각 군현 동학군들이 일어나도록 지원하기로 하였다. 하동을 점령했던 영호 동학혁명군은 11일에는 남해를, 13일에는 사천을, 15일에는 곤양을, 20일에는 진주를 점거해 서부경남으로 동학농민혁명을 확산시켰다. 진주까지 점령한 동학군은 9월 24일까지 대부분 진주를 빠져나왔다.
남해의 동학농민혁명은 하동접주 여장협의 요청으로 정용태 남해접주를 비롯한 동학도가 하동으로 건너가 하동부 점령에 동참한 것으로 본격화하였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남해읍성을 점령하였다. 여수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있던 영호 동학군은 9월 10일 서상항을 통해 남해로 들어왔다. 당시 여수의 동학혁명군을 이끌었던 인물 중 한 명이 도접 심송학이었다. 그는 여수에서 남해를 거쳐 하동의 고성산 전투에 참여하였다. 서상리에는 8월에 대정으로 임명된 박용필이 있었다. 박용필은 서상항으로 들어온 심송학이 이끄는 영호 동학혁명군을 맞이하여 임진성으로 안내하였다. 이날 여수의 동학혁명군은 임진성에서 숙영하였다.
임진성에서 유진한 호남의 동학혁명군은 이튿날인 11일 아침 죽전리에 모인 남해 남면, 이동, 삼동의 동학도들과 합류해 진정한 의미의 영호동학혁명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모인 인원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죽전에 집결한 영호 동학혁명군은 출정식을 갖고 상가리를 지나 하지산의 왼쪽을 거쳐 대정리로 향하였다. 대정리에서 서면의 동학도들도 합류하였다. 영호동학혁명군은 수치산 오른쪽을 끼고 야촌마을로 향하였다. 야촌마을에는 정용태 남해접주가 거주하는 곳으로 남해 동학도소가 있었다. 야촌의 동학도들도 합세하여 더욱 세를 키운 영호 동학혁명군은 남해읍성으로 향하였다.
죽전마을에서 상가리, 대정리, 야촌을 거쳐 남해읍성까지는 약 11km로 도보로 서너 시간 정도 소요된다. 따라서 아침 8시경에 죽전을 출발한 영호 동학혁명군을 막지 못해 동학혁명군은 큰 피해 없이 남해읍성을 장악하였다. 이는 경상감사의 장계에 남해의 군속들의 피해가 있었다는 내용이 포함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군수 이규풍은 동학혁명군의 남해읍성 점령과 활동을 경상감사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달 11일에 호남의 동도 19명이 본현(남해현)에 갑자기 들어와서 이청에 자리를 마련하고 감옥의 형리와 옥쇄장을 위협하여 갇혀있던 비류 16명을 제멋대로 풀어주었으며 읍의 폐단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난류를 모아 읍과 촌을 다니며 폐단을 저지르는 게 심상치가 않습니다. 16일에는 그 무리 200여 명이 앞장을 서서 인도한다고 하며 진주에서 곤양 등지로 갔습니다.
남해를 점령한 동학혁명군은 첫째, 관아의 각 이청을 전부 장악하고 관의 옥쇄 등 기물을 차지했다. 둘째, 남해관아의 감옥에 수감된 동학도 16명을 석방하였다. 셋째, 남해읍의 폐단을 혁파하였고, 넷째, 남해 각 지역을 돌면 동학농민혁명의 이념을 전파하고 불량 유림과 토호들을 벌하였다. 이상의 활동은 호남의 각 지역에서 집강소를 설치하고 했던 것들이었다. 따라서 남해관아에 동학혁명군이 집강소가 설치해 운영하였음을 뜻한다.
이규풍의 보고에 따르면 일주인간 남해에서 활동하던 동학혁명군은 16일에 진주로 향했다고 되어 있다. 그 이유는 18일에 영호대접주 김인배가 서부 경남의 중심인 진주성을 점령하기 위한 활동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남해의 동학혁명군 전부가 떠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남해읍성을 그대로 장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19일 사천의 동학혁명군이 남해로 합류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장계의 마지막에 조병호는 “지금의 형편으로는 중과부적입니다.”라고 적었다. 이는 9월 말까지 하동, 남해, 사천, 진주, 고성 등 서부 경남의 5개 군현에서 동학혁명군의 일부는 진주로 향하였고, 나머지는 9월 말까지 약 20일간 활동을 이어갔다.
남해의 동학혁명군이 완전히 떠난 것은 일본군의 서부 경남 출정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서부 경남과 호남의 동학혁명군은 합세해 일본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남해를 떠났다. 남해읍성을 빠져나온 동학혁명군은 고현을 지났다. 당시 고현면에는 정원섭이 집강으로 동학농민군의 군량미를 모집하였다. 동학혁명군은 정원섭이 모아놓은 군량미를 챙겨 고현을 지나 설천의 비란, 진목, 문항, 금음, 남양을 통과하여 덕신으로 향했다. 덕신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하동으로 건너가기 위해 하노인에게 배를 준비하라고 하였다. 하노인의 안내로 덕신에서 구두산의 왼쪽으로 고개를 넘어 노량에 도착한 동학혁명군은 배를 타고 하동의 금남면 노량리로 향하였다. 남해에서 활동하던 여수와 남해의 동학혁명군은 10월 초에 여장협이 이끄는 동학혁명군과 합세해 하동 금오산전투(10월 10일), 남강 상평 전투(10월 10일), 고성산 전투(10월 14일)에 참전하였다. 고성산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부는 광양으로 피신해서 섬거역 전투(12월 8일)에 가담하였다.
요컨대 남해의 동학혁명은 남해의 동학도들과 여수에서 들어온 영호 동학혁명군이 함께 남해읍성을 점령해 집강소를 설치하고, 수감된 동학도를 석방하고, 탐학한 관리와 불량한 양반을 징치하였다. 또한 남해 전 지역을 다니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동학에 입도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다. 약 20일간 남해읍성을 점령했던 동학혁명군은 일본군의 출동에 대항한 항일전을 위해 남해를 떠나 하동 고성산 전투와 광양 섬거역 전투까지 서부 경남과 동부 호남을 주무대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아직 남해 동학농민혁명의 실체는 다 밝혀지지 않았다. 이를 위해서는 추가 조소와 연구가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