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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문화유산

남해군 문화유산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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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남해 충렬사 (南海 忠烈祠)

상세내용

남해 충렬사 (南海 忠烈祠)

 

 

○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제사유적 / 제사터
○   수량/면적                   12,582㎡
○   지정(등록)일              1973.06.11
○   소재지                         경상남도 남해군 노량로183번길 27(설천면, 남해충렬사)
○   시  대                           조선시대
○   소유자 (소유단체)     남해군 등 
○   관리자 (관리단체)     남해군 

 

 

 

충렬사는 충신과 열사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남해 충렬사는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충무공의 유구(遺軀)를 처음으로 안치한 것을 기려서 순국한 지 30년째 되던 인조 6년(1628)에 지역의 선비들이 초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효종 9년(1658)에 다시 지었으며, 현종 4년(1663)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려 준 현액을 받았다.

 

사당 앞에는 우암 송시열이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충무이공묘비(忠武李公廟碑)가 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 내삼문, 외삼문, 청해루 등이 있다.

 

사당 후원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초빈*했던 곳에 가묘**가 있다. 사당을 세운 이후에는 충렬사 옆의 호충암(護忠庵)에서 화방사(花芳寺)의 승장*** 1명과 승려 10명이 교대로 사당을 지켰다.

 

*초빈(草殯): 장사를 지내기 전에 시체를 방 안에 둘 수 없는 경우에 관을 바깥에 놓고 이엉 같은 것으로 덮어서 눈비를 가리는 것 **가묘(假墓): 정식으로 묘를 만들기 전에 임시로 쓰는 묘 ***승장: 승려들로 조직된 군대인 ‘승병’의 장수

 

 


 

 

※ 설명

 

남해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노량충렬사라고도 한다.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 ‘충열’이란 현판을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 왔으며 인조 때 지어졌다. 충무공이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한 때 이곳에 모셔졌는데 인조 10년(1632) 유림들이 옛 터에 작은 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최초의 사당이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60년이 되던 효종 9년(1658)에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다. 그 후 현종 4년(1663)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려준 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기록한 충무이공묘비가 사당 곁에 있으며, 비문은 현종 2년(1661)에 송시열이 썼고, 1663년에 박경지 등이 세운 것이다.

옛날에는 이 사당 곁에 호충암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화방사의 승려 10명과 승장 1명이 번갈아 와서 사당을 지켰다고 한다. 또한 공이 죽은 후 자운이란 승려가 공을 사모하여 쌀 수백섬을 싣고 와서 공을 위해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자운은 원래 충무공의 밑에 있던 승병이었다.

 

충렬사는 충무공의 노량 앞바다를 지키고 있는 수호신의 사당이라 할 수 있다.

경내에는 비각·내삼문·외삼문·관리사 등이 있고 사당 뒤의 정원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임시 묻었던 자리에 묘가 남아 있으며, 1948년 정인보가 쓴 충열사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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