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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인물

학문(교육·학자)

정병욱 (鄭炳昱)

내용
-
출처
남해문화원
출생지
설천면 문항
시대
1922.03.25 ~ 1982.10.12

상세내용

남해 출신. 국문학자, 민속학자 겸 수필가이다. 본관은 진양(晋陽), 호는 백영(白影)이다.

 

 

 

▶ 학력

 

경성 연희전문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학사(1948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석사(1968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1972년)

 

 

▶ 경력

 

부산대학교 교수

연세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박물관 관장

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한국판소리학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정회원 

 

 

▶ 이력

 

경상남도 설천 문항리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냈고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에서 성장하며 소년기를 보내고 초등학교(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경상남도 하동과 전라남도 광양에 거처를 두고 동래고보와 연희전문 문과,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왔다. 1948년부터 부산대학교, 1953년부터 연세대학교, 1957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하였고, 서울대 박물관장, 학술원 정회원을 역임하였다.

 

 

▶ 일생

 

1922년 출생한 그는 3·1운동 후 교사를 하게 된 부친을 따라 1927년부터 경남 하동군(금남면 덕천리)에서 성장하고 1934년, 부친이 전남 광양에 양조장을 겸비한 주택(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소재, 근대문화유산 등록)에서 사업을 열자 그곳에서 하동 집을 오가며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 학업을 위해 부산 동래, 서울 등으로 집을 떠나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는 방학 동안 동생들과 함께 본가인 하동 덕천과 섬진강 하류를 사이에 둔 광양 망덕에서 지냈다. 

그는 시인 윤동주의 벗이자 후배로 연희전문 기숙사와 하숙에서 생활을 함께하고, 자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를 증정받아 일제의 눈을 피해 망덕의 집에서 지켜냈다. 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강제 징병으로 전장에 끌려가게 되자, 어머니께 소중한 원고니 꼭 지켜달라는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겨, 어머니는 마루바닥을 뜯고 보관했던 것이다. 윤동주가 옥사하고, 해방이 된 후 정병욱은 그 원고를 찾아 윤동주의 전문학교 동기 강처중, 동생 윤일주 등과 함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게 된다. 한글과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말의 탄압 속에서 윤동주의 시를 보존하고 윤동주라는 시인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인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은 그가 수필 <잊지못할 윤동주>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외에도 한국 고전문학 연구분야에 학문적 초석을 놓고, 주 전공인고전 시가를 비롯해 국문학의 여러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판소리의 연구와 보존, 대중화 운동에도 선구적 업적을 남겨 판소리를 민족예술의 정화로 부활 계승토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부산대, 연세대학교 교수를 거쳐 27년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여러 권의 저서와 함께 수십 편의 수필도 남겼다.

또한 하버드대와 파리대학 초빙교수로서, 한국 고전 시가 논문 발표 및 강의 활동 외에도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 한국 문학 항목을 집필하였다. 그 외에도 유수의 권위있는 국제 학술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한국문학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학술적 업적으로 1967년 한국 출판문화상 저작상, 1979년 외솔상, 1980년 삼일문화상을 받았으며 은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현재 그가 살았던 전남 광양시 망덕에는 그의 집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보존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며, 원고를 보관했던 마루 등이 남아있는데 원형을 복원 중이다. 

그는 한국 고전문학 연구에서 한 획을 그은, 실험적이고 실사구시하는 연구 태도를 견지해 많은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판소리를 학문 분야로 들여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저서로 "숫문학산고"(1959), "한국고전시가로"(1976), "한국고전의 재인식"(1979), "한국의 판소리"(1981) 등을 남겼다. 2,376수의 시조작품을 모아 주석을 단 "시조문학사전"(1966)도 괄목할 만한 성과다.

 

 

▶ 생애와 학문 활동

 

1922년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에서 3.1 운동 후 보통학교의 훈도를 하던 정남섭(鄭南燮)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교직 근무지인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에서 유소년기를 보내며 그곳의 진정공립보통학교(현 진정초등학교)와 하동공립보통학교(현 하동초등학교)를 마치고 동래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1944년 졸업을 앞두고 일제 학병으로 징집되어 전쟁을 겪다가 해방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귀환하여 1946년 입학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1948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부산대학교, 연세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1955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박물관장을 역임했다. 197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문학자 이병기, 조윤제, 국어학자 최현배의 제자로서, 일제에 저항하며 조선의 민족어문과 역사문화의 전통을 계승 표창하려던 초창기 국어국문학자들의 민족주의 학풍을 계승하였다. 6.25로 남북 분단이 고착되자 전시 임시수도 부산에서 부산대 교수로 함께 재직하던 국어학자 허웅 교수와 국어국문학회 창립을 주도하고, 해방 후 본격적인 학문으로서 국문학 연구의 이론적 초석을 놓았다. 고전에 대한 학문적 조예와 문학에 대한 심미적 감식안을 겸비하여 고전 시가를 중심으로 국문학에 대한 문헌 역사적 연구와 문예 미학적 연구를 병행하며 《시조문학사전》, 《한국고전시가론》 등의 저서로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 3.1문화상, 외솔상 등의 학술상을 수상하고 학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국문학계를 대신하여 대영백과사전(Encyclopedia of Britanicca)에 한국문학을 소개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과 프랑스 국립 파리 대학교에 초빙교수로 활동하며 강의와 논문 등을 통해 세계에 한국문학의 역사 전통과 특징을 알리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판소리학회를 창립하고 판소리의 연구와 함께 감상 보급 운동에도 힘썼다. 대영백과사전을 국내에 총판하던 한국브리태니커사(뿌리깊은나무사: 사장 한창기)에서 물적 지원을 하고 강한영, 이보형과 같은 학자가 도운 판소리 감상회는 그의 주도로 5년간 100회를 거듭하며 명창들을 재발굴 소개하고 대표 음반을 해설과 함께 출판 보급하는 성과로 이어져, 명맥이 끊겨가던 판소리의 부흥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러한 판소리의 부흥운동과 함께 종합예술로서 판소리의 역사와 예술적 성격을 구명한 저서 《한국의 판소리》 등 논저를 통해 그는 판소리의 위상을 한국의 전통문화예술을 대표하는 정수라고 규정하여, 김소희와 같은 판소리 예능 원로들로부터 판소리계의 은인으로 존승받았다. 만년에는 시가, 판소리 문학뿐 아니라 전통 음악과 무용 등을 포괄하는 한국 전통예술의 미학원리를 모색하는 연구에까지 이르렀으나 1982년 10월 12일에 급성 저혈압과 간암 등의 합병증세로 인하여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후에 한글과 국문학에 대한 공헌으로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 윤동주와의 관계

 

전공자들에게는 국문학의 체계를 확립한 (해방 후) 제1세대 학자로 유명하나 수험생들과 일반 국민에게는 윤동주의 친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에 1940년 봄 입학하여 신문에 발표한 글이 선배 윤동주의 주목을 받아 함께 기숙사를 나와 하숙을 하는 등, 약 2년 가까이 청년 학창시절을 단짝으로 지내며 영향을 받고 민족의식, 문학의식을 공유하였다. 윤동주가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2년 후 정병욱은 1944년 1월 졸업을 앞두고 일제 학병으로 강제징집되어 오사카의 방공포대에서 전쟁을 겪었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에 편입하여 졸업 후 바로 대학 교수가 되었다. 국문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낸 학설로는 한국 시가의 이른바 3음보 학설을 비롯하여, 고려가요와 조선 시조 등 고전시가의 체계와 특징을 정리한 시가 장르론이 가장 주목을 받았다. 주전공은 고전시가 쪽이었으나 김시습을 연구하던 중 <대동야승>을 모조리 읽고 학사 졸업논문을 썼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으며, 조선 왕실도서관격인 낙선재에서 고전 장편대하소설들을 대량 발굴 소개하기도 했다.

 

또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친필 원고를 보존하고 윤동주의 연희전문 동기 강처중 및 동생 윤일주와 유고를 모아서 시집을 간행한 벗으로도 유명하다. 연희전문을 졸업하게 된 윤동주 시인으로부터 증정받은 육필 원고를 일제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 전라남도 광양시에 위치한 본가에서 모친에게 맡기면서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해 달라'라고 당부하고 전장으로 떠났는데 이 유고가 보존되어 해방 후 윤동주와 그 시집이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한글은 물론이요 우리말까지 공식적으로 못 쓰게 한 암울한 시절에 사실상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걸고 윤동주의 유고를 지켜내 시인 윤동주의 존재와 그 시를 우리 문학사 속에 되살려낸 공로자인 셈이다. 1955년에는 윤동주 유족이 고향에서 가져온 유작들을 초판본 시와 함께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재판본을 간행하고 발문을 통해 윤동주를 일제말 암흑기에 저항한 민족시인이라 논정하였다.

 

6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 국정교과서에는 <잊지 못할 윤동주>라는 그의 수필이 실려 있었고, 윤동주의 인품, 성격과 생활, 시작 태도와 배경 등을 알려주고 있는 이 글은 지금까지 여러 문학 교과서에 편집되어 실리고 있다. 이 글을 비롯 여러 글들과 교육 문화 활동을 통해 그는 한국 고전문학과 판소리뿐 아니라 윤동주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평생 헌신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여동생 정덕희가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와 결혼하기도 했다. 사적으로는 벗일 뿐 아니라 사돈지간이 된 셈이니 윤동주와 정병욱은 개인적으로나 한국문학사를 위해 참으로 운명적인 인연을 맺은 것이다. 호인 백영도 윤동주의 시 중 '흰(白) 그림자(影)'를 그대로 따 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