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사회(정치·경제·행정)
장대우
상세내용
1976년 '향토발전사'에 이어 두 번째로 남해의 역사를 담은 책을 발간했다. 이책이 앞으로 남해의 종합 정보지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모두 10개의 큰 주제로 엮어지는 '되돌아본 남해 100년사'는 역대 정치사부터 역사속의 남해, 되돌아본 남해사, 함께하는 교육, 남해문학의 요람, 세월따라 남해따라(관광남해), 남해인의 삶과 발자취, 지난날의 사건 사고, 그때 그 사건들, 언론편, 사이버 속으로의 컴퓨터 세상등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다.
40여 년간의 자료수집을 통해 책을 출간한 장대우 선생은 지난해 5월부터 모아놨던 남해와 관련된 자료와 책, 취재수첩, 신문스크랩까지 전부 손수 하나하나 정리할 정도로 '되돌아본 남해 100년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 경력
1965년 언론계 입문 / KBS 부산방송국 남해하동지구 특파보도원
MBC 진주 보도부 기자 / 경남일보, 부산매일신문 기자 / 1975년 제3대 남해문화원장 역임
향토문화진흥원 상임운영위원 / 국사편찬위원회 남해군 사료조사위원
남해문화원 자문위원, 고문 / 서복회 사무국장 / 남해역사연구회 고문 역임
젊은 시절부터 방송국과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남해의 역사, 정치사, 교육, 문화, 사건사고,
남해인의 삶의 궤적을 정리하여 저서를 발간
『언론인으로 문화원에 투신한 삶』
▶ 초근목피로 살아온 유년기
나는 1941년 12월 9일 남면 당항리 우형마을에서 6남매 중 3남인 막둥이로 태어났다. 내가 우형마을에서 태어난 이유는 외갓집인데다가 아버지께서 남명국민학교와 가천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교사로 재직하면서 서당에서 한문도 가르쳐주는 훈장이기도 했다.
우국청년이었던 아버지께서는 남명초등학교 가을운동회에 밤새 손수 그린 태극기, 만국기 50여 장을 게양한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갖은 고문 끝에 교사직을 떠나야 했다. 스무 살 청년의 애국심이 결국 집안을 어렵게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훈장 하나 남기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러한 어려움과 함께 1942년과 1943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최악의 흉년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께서는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가족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대판과 북해도 등지를 전전하며 날품팔이와 중노동을 했다. 그래서 재산을 좀 모으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해방을 맞아 다음해인 1946년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일본에서 모은 재산은 화물선에 싣고 사람은 따로 여객선을 타고 오는데, 화물선이 침몰하는 사건이 생겼다. 일본에서 어렵사리 모은 살림살이가 모두 바다 속으로 잠겨버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 빈털터리가 된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인 고현면 대곡과 남해읍 곡내, 고현면 이어리를 전전하며 하루 세 끼조차도 챙겨 먹을 수 없는 빈곤한 삶을 살아야 했다.
초근목피(草根木皮)라는 말 그대로 살아온 유년기였다. 어머니는 베적삼을 삼고 짜며 푼푼이 모은 돈으로 초가집 한 채를 장만하게 되었지만, 해방 후의 혼란, 6·25전쟁, 1953년의 극심한 가뭄 등으로 인해 몸서리 고통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으로 피와 눈물로 삶을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기 때문에 내 이름은 력개였다. 아버지께서는 일본에서 나오자마자 대우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주었다.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탓에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해 놀림을 받으면서 초등학교 생활을 했지만 일본말은 금새 잊혀졌다.
아버지께서는 교사에서 해임된 후 남해 언론 역사상 처음으로 「시대신문」과 「경향신문」남해지사를 운영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신문배달과 운영을 도우면서 학업을 했다. 아버님이 하던 신문을 큰집 형님이 이어받아서 「국제신문」, 「세계일보」, 「경향신문」등 대여섯 개를 했다. 나는 망운산으로 나무하러 다녔다. 욕심이 많았던 나는 나무를 많이 하다가 아마 억눌려서 키가 크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어쨌든 땔감을 시장에 내다 팔아 학용품도 사고 생활비에 보탰다.
이어리에 살던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형편이 조금 풀려 남해읍 유림동 640번지로 이사를 했다. 그 후 신문 총무를 하면서 수금도 하고 버스에 발송도 하고 살았다. 보통 하루에 50리, 백리 길을 걸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이 "땀을 흘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이룰 수 없다. 無汗不得 無汗不成 (무한부득 무한불성)"는 진리를 어린시절부터 터득해온 것 같다.
▶ 언론과의 만남
남해에서 어렵게 살던 나는 남해에서의 탈출을 시도했다. 더 이상 신문배달과 수금으로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부산으로 도망을 갔다. 나이 스물 둘에 도저히 내 삶을 내 인생을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부산으로 도망간 것이 언론인으로 삶을 살게 한 것이다. 방송국에서 표창도 많이 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KBS에서 6년간 열심히 기자 생활을 하던 중 「조선일보」박청두 기자가 "동생아, KBS는 공영방송이라 월급도 작은데 네 실력이면 진주 MBC로 가는게 좋겠다." 하기에 마침 시험이 있어 응시한 결과 또 수석합격을 했다. 다른 사람은 견습을 받는데 나는 경력기자라 견습도 받지 않고 검찰청, 진양군청, 군 농협, 전매청 등 여섯 곳에 출입하면서 본격적인 기자생활을 했던 것 같다. 부산에서 몇 개월을 보내던 중 마침 대청동에 있던 KBS 부산지사 벽보판에 각 지역 기자, 통신원을 모집하는 벽보가 있어 응시했는데, 15명 중 수석합격을 했다. 견습 3개월을 받고 하동, 남해 보도특파원이 되어 언론에 종사하게 되었다. 방송에 첫 발을 디디게 되었다. 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부산으로 도망간 것이 언론인으로 삶을 살게 한 것이다. 방송국에서 표창도 많이 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기자라는 생활은 어려움이 많다. 남들 앞에서는 환대를 받지만 돌아서면 손가락질 받는 경멸 받는 직업이다. 나는 나름대로 어려운 삶을 살았고 성품이 바르기 때문에 정직한 진실 보도를 하면 욕 안 들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기획기사를 많이 썼다. 또 정의로운 기질로 생활했기 때문에 칭찬과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으로 언론사가 통폐합되면서 잠시 6개월간 기자생활을 쉰 후 부산 「매일신문」이 생기면서 다시 취업하여 30여년간 기자생활을 할 수 있었다.
▶ 문화원에 투신
1963년 12월, KBS 기자로 남해와 하동을 취재하고 다닐 때 큰형 장정백은 박성권, 김선일, 정홍영, 박병림, 김창수, 장홍종, 문재원 등 선배님들과 함께 남해문화원 설립 발기인 대회를 열고 설립위원회를 구성한 후 위원장에 취임했다. 인근 시군에 문화원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는 현실을 보고 문화진흥을 위해 형님이 발 벗고 나섰던 것이다.
장정백 형님은 발기인 회장, 설립추진위원장을 맡아 피땀을 흘린 결과 1965년 2월 25일 문화원을 창립하고 사단법인 남해문화원을 등기 완료했다. 그리고 형님인 장정백은 초대원장이 취임했다. 하지만 예산 한 푼 지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문화원장이 50% 이상의 부담을 하면서 문화사업을 해야 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사는 형편에 문화라는 것에 대한 관심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우리네 삶과 생활이 문화임에도 군민들은 문화원을 인식하지 못했다. 개인사업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형님의 뜻을 받들어 1974년 제3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겨우 서른넷의 나이에 전국 최연소로 문화원장이 된 것이었다. 남해군의 예산 지원 없이 오직 원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의지 하나만으로 사업을 추진해야 했다. 새로운 문화창달을 위해 젊음의 지성, 사회봉사라는 각오로 무한부득(無汗不得) 무한불성(無汗不成)이라는 신념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일찍이 문화원 사업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특히, "지방문예진흥사업은 문화원의 사명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지방 전통문화를 발굴하는 데 큰 관심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혼신의 힘을 바쳐 일한 것은 지금도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으로 남아 있다.
예산 지원 없이 원장인 내가 자부담으로 하는 사업에 한계를 느껴 나는 문화요원 50여 명을 결성하고 남해 향토문화연구회를 개설했다. 초대 회장으로 이청기 씨를 추대했다. 그리고 1976년에는 남해문화진흥회를 창립하여 초대회장으로 최치환 국회의원을 추대했다.
나는 사라져 가는 전통농악을 계승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전수자 발굴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매년 남해 향토민속농악경연대회를 개최했다. 그 결과 진주개천예술제에서 우수상과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문화원장 취임 초기인 1975년 여름에는 MBC 진주문화방송 남해사무소 개소기념 납량임해 공개방송을 상주해수욕에서 열었다. 그것은 내가 MBC 기자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날 상주해수욕장에는 5만명이 넘는 군중이 몰려 대혼잡을 이루었다. 남해군이 생기고는 이렇게 많은 군중을 볼 수 있는 최초의 일이 었다.
......
내가 남해문화원장으로 재임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내 고장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향토발전사를 편찬한 것이다. 500부밖에 인쇄하지는 못했지만, 1976년 당시로서는 거금인 360만 원의 사비를 출연하여 남해사상 최초의 역사화보집을 만들었다. 그것은 15년 동안 언론인의 길을 걸으면서 모아두었던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