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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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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기(출생 : 남해군 설천면 고사)

 

이처기 선생은 ‘남해찬가(南海讚歌)’를 제작하였다. 남해군의 10개 읍면 아름다움을 시조로 엮었다. 시조와 고향 남해를 알리는 데 열정을 아끼지 않는 이처기 선생이 남해의 아름다움을 담은 영상에 시조를 입혀 남해의 아름다움을 기렸다. ‘남해찬가’란 이름을 단 이 영상물은 남해읍과 9개면을 돌아가며 그 지역을 시조로 읊은 작품이다. 읍면별로 특징을 살린 6행의 시조를 음미하는 맛도 쏠쏠하다. 아울러 배경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동요 반달, 섬집아기, 고향땅, 작은 별과 아리랑 등을 깔아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17년 경남문인협회 주관 <아름다운 경남> ‘경남 시군 수려한 산하의 문학적 형상화’ 작품공모에서 남해군편 우수작으로 선정된 시조 작품이기도 하다. 영상물은 모두 4분 10초 분량이다.

영상제작자인 이처기 선생은 “남해찬가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물려받은 남해의 풍물과 역사를 경관과 더불어 함축한 노래인데 군민들과 향우들께 얼마나 공감이 될지 기대된다.”며 “군 내외 행사와 축제에 많이 활용되길 바란다. 아울러 제작에 도움을 준 군수님과 홍보팀 관계자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출처 : 남해시대>

 

지난 2021년 남해신문에 임종욱박사가 올린 기사를 살펴보면 ‘이처기, 고향의 아우성을 소리로 빚어낸 시조시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2021년 6월 24일 신협 3층 강당에서는 시조시인 이처기(李處基) 선생의 문학 특강이 열렸다. 팔순을 홈쩍 넘긴 노시인은 1990년에 사향(思鄕)의 마음을 알알이 담아낸 연작시조 <남해 찬가> 11수를 발표해 고향 남해의 굽이굽이 아름다운 능선과 바다내음을 정결한 언어로 표현했었다. 30년 넘게 시조 창작을 천직으로 삼아 고향의 정서와 풍경, 사람들을 그려냈다. 이에 본지에서는 이처기 선생의 문학적 삶을 여행하는 즐거운 잔치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교사와 시인으로 수미일관한 청춘

이처기 선생(이하 경칭 생락)은 1937년 12월 29일 설천면 고사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찬홍 옹과 어머니 김윤악 여사 사이 차남이었다. 할아버지 이예모 선생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남해로 가져오고 설천 남양에서 벌어졌던 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남해읍으로 이사를 가 남해초등학교와 남해중학교, 남해농고에서 공부했고, 부산사범대학 미술과에 입학해 졸업했다. 이처기는 1962년부터 2000년까지 38년 동안 교직에 있었다. 도내 중고등학교 교사를 지냈고, 1987년 남해 미조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한 뒤 창원반송여중 교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미술을 전공한 학도답게 섬세하고 자상한 성품으로 학생들을 이끌어 교사로서 모범을 보였다. 부인 유정자 님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다.

교육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이처기는 문학 창작의 열정을 감추지 못해 습작에 몰두했다. 1983년 경남교원예능경진대회 시조부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뒤 1989년 창원시조문학회 창립회원으로 경남 시조의 줄기를 든든히 다지는 데 전념했다. 1989년 『현대시조』 신인상을 수상하고, 1990년 『시조문학』 에서 추천 완료되어 등단했다

 

이처기는 시조 창작을 하늘이 준 소임으로 알아, 첫 시조집 『널문리 가는 길』 (1993년) 이후 『평양면옥』 (1998년), 『화진포 연가』 (2004년), 『장엄한 절정』 (2009년), 『하늘채 문간채』 (2016년)를 발간했고, 2019년에는 '우리시대 현대시조선' 『오동나무』 를 내놓았다.

하고많은 문학 장르 가운데 왜 시조를 선택했는지를 그는 이렇게 밝혔다

"나라마다 고을마다 그 사람들의 가슴에 흐르는 내면의 원초적 소리가 있다. 그 소리가 언어를 업고 희로애락을 펼쳐간다. 그 나라마다 민족마다 응어리진 한과 정이 배인 소리가 있다. 그 소리가 언어를 심고 장단고저를 타고 울리면 노래가 된다."

개인부터 겨레를 하나로 엮어 올린 언어의 고갱이가 그에게는 '시조'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만남과 되새김의 미학

시인 이처기는 수백 편이 넘는 자신의 작품 가운데 <그 해 여름의 6월> 연작과 <보자기> 연작, <기억을 날리다> 연작 세 편을 회심작으로 꼽았다. 이들 작품을 읽으면 시인 이처기가 지향했던 시조 세계의 얼개가 잡힌다. (지면상 일부만 싣는다)

 

아직은 전설이 아닌 헤어진 사연의 피켓

비 젖은 벽보에서 차마 눈을 떼지 못하고

굳어진 돌부처가 되어 별을 헤듯 서섰네.

<그 해 여름의 6월>(3)

 

이 작품은 1983년 공영방송 KBS에서 방송한 '남북이산가족찾기'를 본 감격을 시화했다. 30년 넘게 생사조차 몰랐던 이산가족들이 방송국 광장에 모여 수만 장의 사진과 사연을 적어 붙였고, 1만 건이 넘는 상봉이 이루어졌다. 5개월 동안 그야말로 산하는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재회를 보면서 시인의 마음도 복받쳐 올랐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의 질은 무늬들이 나비처럼 피어울랐다. 벅찬 감동에 시인은 '돌부처'처럼 굳어졌다.

 

장롱 속에 오래 묵힌 매듭을 꺼내보면

소중히 싸 두었던 그리움이 일어나서

간절히 포장하여 둔 내력들이 풀어진다

-<보자기>(1)

 

유년 시절 시인의 억센 기억들을 담아놓은 보자기. 장롱 속에서 꺼내 하나하나 펼쳐보니 신산했던 시절 들의 갈피가 실낱처럼 흩날린다. 마지막 끝단까지 풀어헤쳐 오방색 수실로 엮어야 하는 '맑은 얼굴'들. 사연들. 시인의 문학이 어디서 출발했고, 어디로 매듭질 것인지 짚어주는 작품이다. 어린아이 때 고향의 언덕을 뛰놀며 바라본 강진 바닷가. 골짜기마다 물결마다 오롯이 울리는 향토의 향기. 그리고 고향 벗들의 웃음 소리, 울음소리. 이 모두를 시인은 작품 속에 녹아냈다.

 

잠자듯 가벼이 저 멀리 떠간다

투명하게 행군 자락 고요히 유영하는

훨 훠훨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억

-<기억을 날리다-잠자리>(1)

 

이 작품은 시인의 자화상이다. 삶과 언어에 남은 얼룩과 구성진 세파에서 균형을 잡는 '은빛 날개'. 그물을 피해 가며 무상(無常)의 더께가 깔린 시공을 "꿈도 꾸며 물구나무도 서 가면서" 시인은 살아왔다. 그 불안한 비행이 시인은 두려운가? 청령(蜻蛉)으로 승화한 시인은 바람을 타고 얼의 고향을 향해간다.

이처기 시인에게 몸은 창원에서 살아도 고향 남해로 향하는 발걸음이 끊어진 때는 없다. 문학 관련 행사가 있거나 기념할 만한 일이 있으면, 또 가족이나 친지들을 만나고 고향의 흙 내음이 그리울 때면 언제나 남해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시인의 따뜻한 품성은 그의 세상과 사람을 향한 시선에서도 느낄 수 있고, 밭을 갈 듯 써내려간 작품에도 알알이 열매 맺어 있다. 30년 넘게 줄곧 매달려온 시작(詩作)의 길.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붓끝은 무뎌지지 않는다.

시인이 생각하는 고향, 그리고 사람들. 또 문학에 대한 탐구심. 여러 가지가 궁금해 만날 때마다 문의했고, 부족할 때면 메일이나 문자를 통해서도 보충했다. 그렇게 듣고 적은 이야기들을 인터뷰 형식으로 간략하게 정리했다.

 

선생님 문학의 원천은 어디라고 봐야 할까요?

= 세상과 사람, 겪은 일과 생각들이 모두 글을 쓰는 데 힘이 되지요. 그래도 꼭 한 구절로 묶는다면 2016년에 낸 시조집 『하늘채 문간채』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거기서 저는 "산 / 강 / 바람도 만나 보았다. // 더 그리운 건 사람이었다. // 정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시조집을 내면서 내 창작의 뿌리가 어딘지 돌이켜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런 글로 반추랄까 다짐이랄까 스스로를 다그치는 심정을 담았습니다.

 

결국 자연과 사람, 그리고 거기서 솟아나는 정()이 창작으로 결집되었군요

= (웃으면서) 제가 정이 많아 그런가 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고향을 멀리 떠난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붙박아 살지도 못했어요. 교사라는 직업이 어딘가 장돌뱅이 같거든요. 하지만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타지에 있어도 눈길이 머무는 곳은 고향이 있는 하늘이었지요. 세상의 모든 자연과 사람이 항상 고향의 산천과 얼굴들로 수렴되었고, 그 애틋한 정이 제 시적 언어를 끌어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시조에 마음을 붙이셨군요

= 그래요. 젊어서는 여러 장르를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시조만큼 나 자신이나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게 없더군요. 반천 년 넘게 이어온 시조의 가락과 운율은 곧 우리들의 혼과 맥을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더 올라가면 고려가요나 향가에서도 시조의 자취는 읽을 수 있어요. 우리들의 정과 한을 시조가 아니라면 온전하게 담아내지 못할 거란 확신을 가졌고, 그래서 지금까지 앞으로도 시조를 벗 삼아 살아갈 겁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 나이에 비한다면 정정하다고 해야겠지요? 여든을 넘기면서 몇 군데 탈도 나긴 했지만, 소중한 물건을 고쳐 쓰듯 매사 조심합니다. 남해에서 제 나이라면 아직 어르신 소리를 듣기엔 이르기도 하지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분들의 웃음과 슬픔, 기쁨과 안타까움을 작품 속에 채우려 합니다. 내가 세상을 뜰 때까지 건강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창작의 끈을 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많은 작품을 발표하셨는데요. 그 중에서도 11편 연작시 <남해찬가>는 고향 사랑이 듬뿍 우러난 절창이라 여겨집니다. 선생님께 고향은 어떤 의미인지요?

=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기저귀'와 '어머니'지요. 기저귀는 전세에서 현세로 받아 내세로 전해줄 생명을 수반하는 밑자리이고, 어머니의 양수가 묻어 있는 선물입니다. 자식들 키우느라 늘 노심초사하는 그 마음,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여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노모의 기저귀를 제가 갈았는데, 그럴 때면 요람에서 나를 잠들게 하던 자장가가 들리고 모시베 짜던 베틀가가 연방 들립니다. 고향이란 이처럼 내게는 아주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마음에 참 와 닿은 말씀입니다. 남해 사람의 장점이라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 남해 사람들은 무엇보다 부지런해요. 한 뙈기 땅이라도 있으면 뭔가를 가꾸지요. 자연을 소중히 여깁니다. 또 예절 바른 사람들이에요. 삶에 부대껴도 늘 이웃을 염려하고 도우면서 챙깁니다. 그런 데서 우러나는 인정도 빼놓을 수 없지요. 다음 세대들도 꿋꿋하게 이어진 이런 심성을 잘 기억하고 전하기를 바랍니다.

 

공감이 갑니다. 끝으로 선생님께서 뵌 분들 중에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요?

= 어디 한둘이겠나요. 『사향록』 을 쓴 시나리오 작가인 이청기 선생님, 회나무 앞에 섰던 소설가 김정한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회나무 앞에 있던 목비가 다시 세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또 한국야구의 영웅 최동원 선수도 태생은 남해예요. 국제탈공연예술촌을 만들고 이끄셨던 김흥우 촌장님도 잊지 말았으면 싶습니다. 세계적 기업 MK회사를 이뤄 남해 군민관을 세우신 유봉식 선생님, 재일사업가로 남해장학회를 창설한 현위헌 선생님, 남해의 정신을 문학으로 승화하신 문신수 선생님, 『남해100년사』 를 쓴 장대우 선생님, 남해의 원로이자 서복회 회장이신 박창종 선생님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네요.

모두 우리 남해의 소중한 자산이자 자랑입니다. 그 분들의 땀과 얼이 우리 남해를 기르는 토양이지요. 이 분들 말고도 묵묵히 제 일을 해오며 사셨던 분들이 많은데, 늘 존경하며 본받으려고 합니다. <출처 : 남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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