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종교
호은율사
상세내용
율사의 이름은 문성, 호는 호은, 본관과 성은 밀양 박씨이다. 할아버지는 통정대부 계복이며 원적은 남해군이다. 곤양군 서면 가인리(하동군 금남면으로 화동화력 건설로 없어짐)로 옮겨서 우거했다. 아들 용옥은 능성 주씨(신안 주씨)에게 장가들어 조선 철종 2년(1850) 경술 8월 24일 율사를 낳았다.
어머니의 꿈에 한 범승이 지리산에서 와서 품속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놀라 잠에서 깨어 율사를 낳았다. 갓난아이 때에는 젖을 주지 않아도 울지 않았다. 겨우 이를 갈 어린 나이에도 아이들과 놀기 위해 떼 지어 다니지 않았다. 10세에 부모님이 함께 돌아가시어 할머니 해주 오씨가 길렀다.
3년 후 할머니가 돌아가 홀로 된 율사는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재종숙의 집에 의탁하여 얹혀살면서도 밤낮으로 부지런히 학문을 닦았다. 16세에 출가한 후 용문사 척승 경허능언 장로의 권유를 받아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그리고 금우필기 화상에게서 수계를 받았다. 꿈에 정원에서 죽순이 올라와 대나무가 되자 꿈에서 깨어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법제자들을 거두었다.
첫 참선은 예천 용문사 용호해주 화상을 스승으로 삼았다. 능엄경을 익히고 또 큰 연못에서 바른 것을 보태어 선교를 배우니 부처님의 묘해는 심오했다. 23세 때인 고종 9년 임신년(1872) 대선법계를 피선받았다. 갑술년(1874) 중덕으로 승차되었으며, 을해년(1875) 2월 금우스님의 후임자가 되어 전등례를 행하였다.
28세 때인 정축년(1877) 대덕법계에 진입하고, 같은 해 음력 4월 용문사 백운선원 등 방에서 하안거의 첫날을 시작하였다. 무인년(1878) 봄 하동군 쌍계사에서 선정에 들어갔다.
이듬해(1879) 봄 국사암에 초청받아 만일회와 화엄법회를 행했다. 섣달 8일밤 동안 다른 꿈을 꾸었다. 이로부터 설교에 등단하니 말하는 실력에 막힘이 없었다.
이에 모든 사찰의 증석을 받아 거사의 지위는 부처님의 법과 계율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경신년(1880)부터 정사년(1917)까지 38년간 동래 범어사, 순천 송광사, 곡성 태안사, 산청 대원사, 돌적 및 오봉암, 함양 벽송사, 고성 옥천사, 고성 유점사, 간성 건봉사, 안변 석왕사, 경성 원흥사, 진주 청곡사, 호국사, 구례 화엄사, 남해 화방사 등 각 사찰에 혹은 한두 번, 혹은 서너 번씩 서북지방과 양남(경남, 전남)지방에 발자취가 두루 미쳤다.
융희 2년(1908) 7월 15일에 해인사 상선원에 금강계단을 설치하였다.
해동계율을 천명하고 이로써 6세의 정맥을 이었다. 30번의 큰 모임을 열어 수천명에게 계법을 전했다.
고종 18년(1881) 4월 8일에 처음으로 용문사에 수륙대회를 베풀었다. 이어서 30여 년간 경상도, 전라도 서남 연해에서 구혼자를 구제하니 또한 78명이었다. 그 외에 불화와 탱화를 개선하고, 불도를 수행하는 전각을 중건하고, 세간과 연장을 갖추게 하고, 묘에서 지내는 제사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경작하던 토지와 삼림 등 먹고 사는 일 역시 34곳에 이르렀다. 통영과 진주에 포교당을 열고 단신을 널리 모집하고 종지를 널리 펼치니 남녀 신앙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중국 상해 소인의 『남북장경』2부를 구입하여 호국사와 화엄사 두 절에 눌러두었다. 신해년(1911) 10월 경남 아홉 사찰의 추천으로 연합포교당을 개교하고 사장이 되었다. 이듬해 해인사 포교감독에 임명되었다. 을묘년(1915) 5월 호국사 포교사에 임명되었다. 병진년(1916) 7월 통영군 대화정에서 한양을 성취하여 선원을 이루는 결실을 맺었다.
정사년(1917) 12월 28일 제자 박성월을 불러 이르기를 "내 일생의 사업이 비록 적지 않더라도 한 별이 어릴 때의 일을 반조하는 것만도 못하구나, 세상과의 인연이 이미 다했으니 이제 마땅히 다함에 반하여 업적에 이르렀다. 두 시간 후 다시 깨어나서 이르기를 진해(제자 이름)가 없으니 만사에 거리낌이 많구나. 내가 마땅히 몇 일 동안 연명해야겠구나."
갑자기 생명이 급해지자 제자 성월이 와서 말하기를 "정당히 그러할 때 본래의 면목을 기억할 것입니다." 율사께서 말하기를 "무상 대열반이여! 뚜렷이 밝아 항상 고요히 비추는 도다." 이틀 후 제자 진해가 보러 오자 율사께서 말하기를 "네가 오니 나는 한이 없다. 그래서 내가 죽고 난 후의 일을 부탁하겠다." 스스로 임종계를 표제하고 말하기를 "여하튼 불법의 큰 참뜻은 자성이 본래 비고 고요한 것이다"라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열반에 드니 때는 무오년(1918) 정월 초사흘 오후 두 시였다.
수명은 69세였으며, 법랍(승려가 된 해부터 세는 나이) 54세로 율사께서는 일생동안 계율을 지켰다.
우의(차림새)에 결함 없이 부처님의 법예식을 베풀고, 신명을 바쳐 크게 깨달아 불법을 설하여 중생을 제도했다. 말하는 재능은 막힘이 없고 사람을 대함에 마땅한 예를 차렸으며, 자비로움으로 마음을 남의 아래에 두고 참선을 수행하여 깨달음의 경지를 얻었다.
용맹한 마음으로 정진하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보면 금을 던져 구제하고 사찰을 보충하여 수리하면서 손해를 보더라도 옳은 일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일생동안 율사의 사업의 결과를 이상과 같이 간략하게 기술한다. 임적 후 육일 밤 동안 계속 빛을 발했는데 도유장에 염험한 구슬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미년(1919) 정월 3일 밤에 다시 도유장 앞에 빛을 발하였다. 같은 해 2월 21일 화엄사에 탑을 세웠다. 이날 밤 또 하늘을 뚫고 빛을 발하니 오호라! 기이하구나.
비명에 이르기를, 호은대사는 생각컨데 근세에 이름난 스님이시라 자신을 살피고 마음을 깨달아 행적을 약솔하노라. 몸은 멸했어도 넋은 멸하지 않으니 돌에 새기노라. 몸을 다비해서 사리를 모시니 이렛밤 동안 빛을 발하는구나.
세존응화[불기]2946년[1918]8월2일 제자 숭양산인 장지연 삼가 기록하다.
율사께서 이미 입적하니 불법을 함께 배우던 모든 벗들이 그 자취가 없어질까 두려워 했다. 각자 제 힘에 알맞게 출자하여 돌에 새기는 비용을 도왔다. 이에 세속에서 옳다고 했다. 또한 의를 겉으로 드러내 기록했다. 또한 세간 사람들이 그 의로운 사람에게 느낌이 있어 나란히 기록하니 왼쪽에 적힌 내용과 같다, 화엄사, 안정사 각17인, 천은사 벽송사, 각6인, 쌍계사 23인, 대원사 18인, 다솔사, 관음사 각 11인, 실상사, 선원사, 송광사, 각2인, 태안사 5인, 용화사 4인, 옥천사 9인, 와룔사 10인, 통영군 사람6원 고성군 사람3원이다, 아울러 둘러보니 주로 일을 한 사람은 제자 박진해와 화엄사 주지 진진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