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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근대

일제강점기 남해군의 3.1 독립운동

내용
일제강점기 남해군의 3.1 독립운동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남해군의 3·1독립운동

 

기미 3·1독립만세의 함성은 남해군에서도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남해군 설천면 남양리에 살고 있던 이예모(李禮模, 당시 38세)는 1919년 4월 2일에 인근 지방인 하동군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하여 품에 품고 고향인 남해로 돌아 왔다.

그는 이 지역의 동지인 정순조(鄭順祚, 당시 32세), 정몽호(鄭夢虎, 당시 22세), 윤주순(尹柱舜, 당시 24세)등을 자기집으로 초청하여 독립선언서를 보이면서 전국의 감격적인 3·1독립운동의 소식을 동지들에게 전하자 전원이 혼연일치되어 독립의거를 궐기할 것을 서로 다짐하였다.

그들은 의거 준비를 하기 위하여 각 마을을 돌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규합된 동지들은 다시 대중을 규합하여 의거에 참여할 것을 부탁하니 모두들 승낙을 하고 용감하게 투쟁할 뜻을 밝혔다.

4월 3일 오후 3시경 규합된 설천면민은 남양리 노상에 모두 집결하였다. 대형 태극기는 정순조가 들고 독립선언서는 이예모가 낭독하였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군중들은 장대에 높이 달린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남해읍을 향하여 시위행진을 전개했다.

시위행렬이 고현면에 이르자 당시 고현명장인 김치관(金致寬)은 많은 군중들의 시위 위세에 놀라 경찰 주재소에 밀고를 하였다. 밀고한 사실을 시위 군중들은 날이 어두워지는 무렵에야 알고 다음날에 약속하면서 일단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4월 4일은 남해읍 장날이었다. 전날의 독립만세 시위에서 자신을 얻은 군중들은 원근에서 더 많은 군중을 동원하여 장꾼 등으로 가장하고 남해읍 시장으로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경찰은 전날의 시위를 보아 대단위의 시위가 있을 것을 예상하여 남해읍에 오는 중도에 경계를 하고 저지를 하였으나 모여드는 군중의 기세를 저지하지는 못하였다. 전날의 시위 군중들은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남해읍 시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경이었다.

그들은 더욱더 많은 장꾼과 군중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오후 3시경에 일천여 명의 군중이 모이자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1천여 명의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외치는 함성은 이곳 높은 망운산을 울리고 4면의 바다로 메아리쳐 갔다. 군중들은 태산도 옮길만한 기세로 군청, 학교, 우편국, 경찰주재소까지 뛰어 들어가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아 내동댕이를 치는 등 성난 파도와 같았다. 이때 경찰의 주구이며 민족의 반역자인 김치관은 경찰의 경비 전화로서 경찰과 일본군 헌병대에 신변 보호를 위해 응원을 청하였다.

군중은 일몰에 이르기까지 시위를 하고, 해산하려는 무렵 김치관의 소행을 괘씸하게 여긴 군중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

군중들은 일제히 고현면 이어리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찾아가 습격하였는데 김치관은 없었다. 다시 김치관은 군중들이 습격할 것을 예상하고 남해 경찰주재소 마루 밑에 숨어 있었다. 격분한 군중들은 김치관의 집을 파괴하고 해산 하였다.

'3·1운동비사' 내용 중 경상남도 남해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해-4월6일, 읍내에서 수천 명이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하자 헌병이 제지함에 군중은 헌병을 물리치고 그대로 계속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해산하였다. 이동, 삼동, 남, 서 각면 각동에서 일제히 일어나 만세를 부르고 고현, 설천, 창선 각 면은 동네마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운동을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4월 6일 오후 3시에 고현면 포상리에서는 다시 700여 명.(일본군 기록에는 약 500명)의 애국 군중이 재차 봉기하여 이곳 산상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남해읍을 향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과 보병들은 이들 평화 시위 군중들에게 발포하여 시위대 가운데 1명은 즉사하였고, 이들은 군중이 헤어지는 틈을 타 9명의 주동 인물을 검거하였다.

남해 결찰은 사천 경찰서에 응원을 요청하여 사천경찰서원과 일본군 헌병대 수십 명이 출동하여 주동인물 검거를 서둘러 총 23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대구와 진주에서 재판을 받았다. 대구복심법원에서 19196년 9월 23일에 재판이 있었고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1919년 7월 15일에 재판이 있었다.

피검자 명단과 형기 및 감옥은 다음과 같다.

 

- 대구복심법원에서 판결 징역 3년

정학순(鄭學淳, 23세, 대구) 정순조(鄭順祚, 32세, 대구) 유찬숙(柳贊淑, 28세, 대구) 윤주순(尹柱舜, 24세, 대구) 양태환(梁太煥, 35세, 대구)

 

- 대구복심법원에서 판결 징역 2년

정용교(鄭鎔交, 32세, 대구)

 

-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판결 징역 2년

박내규(朴乃奎, ?, 진주) 정임춘(鄭壬春, 30새, 진주) 하준호(河準互, 33세, 진주) 원복상(元卜相, 27세, 진주) 김희조(金喜祚, 49세, 진주)

강한문(姜漢文, 48세, 진주) 이예모(李禮模, 38세, 진주) 정몽호(鄭夢虎, 22세, 진주) 정익주(鄭益周, 23세, 진주) 유승운(柳承運, ?, 진주)

하상근(河祥根, 20세, 진주)

 

-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판결 징역 1년

이찬덕(李燦德, ?, 진주) 윤희도(尹熙道, ?, 진주) 정갑린(鄭甲麟, ?, 진주) 정흥조(鄭興祚, 30세, 진주) 정재모(鄭在模, 23세, 진주)

양재문(梁在文, ?, 진주)

 

이상 23명은 남해독립만세의 주역들이다. 불행하게도 정학순은 복역 중 옥중에서 순국하고 류찬숙은 출옥 후 옥고에 의한 병환으로 순국하였다. 이들의 형량이 1년에서 3년이었다는 것을 보면 남해의 3·1 독립만세운동이 매우 완강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연해 민중에 대한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극심하였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