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근대
일제강점기 교통 및 교육
상세내용
▶ 교통
(1)철도
한국민의 생활과 이익을 도외시하고 대륙침략정책 수행을 위한 기형적인 발상으로 한국철도가 발전했으며 철도권은 전부 일본이 장악했다. 국내선 확장도 군사상 국방경계상 필요한 철도의 확장에만 치중하였다.
(2) 육상교통
총독부에서 도로개발과 자동차의 보급에 힘을 기울이고 도로규칙을 공포하여 도로를 1등, 2등, 3등, 4등외로 구분하여 도로개발, 보수, 교량수축 등 도로망의 확충도 한국 국민의 이익과 편리를 도외시하고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에 따라 개발했다. 1912년 일본인이 서울에서 택시영업을 시작했으며, 1926년에 트럭이 운송수단.으로 등장하였다.
(3) 해상교통
일본인의 독적물이 되었다. 해상교통의 발달은 항만시설도 현대적 면모를 갖추었고, 항구도 구축되었다. 남해 인근의 여수, 삼천포에 항이 건설되었다.
(4) 항공교통
1927년 일본의 항공법이 한국에 적용되면서 발전되었다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항공기는 일본에 징발 당하고 비행장은 군용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철도, 육상, 행상, 공중 할 것 없이 모두 일제의 대륙침략의 한 방편으로 발전되었다. 1934년의 남해군에는 현재와 같이 섬이라는 이유로 항공교통과 철도교통이 없었다. 그 당시의 육상교통과 해상교통은 다음과 같다.
남해 - 서상간의 남해여수선은 3등급으로 노폭 4.5m, 연장 6,984m, 남해 - 노량의 남해하동선은 3등급으로 노폭이 4.5m, 연장 24,056m, 남해 - 선소진간의 남해선소선은 동외이며 노폭이 4.5m, 연장 14,814m, 지족 - 대벽간의 지족대벽선은 3등급이며 노폭이 4.5m, 연장 10,890m이다.
교통수단은 자동차, 조선날, 우차, 짐차, 자전거 등이었다. 노폭은 지금의 농로보다 좁았다.
해상교통은 1934년 8월 현재 남해면, 삼동면, 순항선 조합에서 경영하는 미조, 선소, 삼천포선이 취향 선박 두 척으로 노구, 물건, 지족, 초음, 선소, 금음, 진목, 율도 등에 기항한 해상 교통수단이 있었고 개인이 경영하는 미조통영선은 취항 선박 하나로 욕지, 물건에 기항했다. 도개인이 경영하는 창선 삼천포선은 취항선박 하나로 기항지 없이 창선 단항과 삼천포를 운항하였다.
이때 순항선조합이 제정(1934년)되었다. 조합의 명칭은 남해면·삼동면 순항선 조합으로 1932년 1월 11일에 창립되었으며, 조함권은 삼동면, 이동면민이고 관리자는 남해군수였다.
조합협의 회원 6명, 사무원 1명, 선원 10명, 취급하는 점수는 11개이고 소유한 선박은 금산호와 망운산호 2척이었다.
순항선 조합의 세입은 사용료 및 수수료 14,870원, 우편체송보조금 216원, 이월금 200원, 합계 15,350원이고 세출은 회의비 50원, 사무원 886원, 사업비 12,661원, 조합채비 1,252원, 예비비 501원 합계 15,350원이었다.
▶ 교육
1911년 9월 1일 발표된 조선교육령에는 한국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식민지 통치를 위한 기초적 일본어 교육과 기술교육만을 한국인에게 허용하고 과거의 전통적 교육기관이었던 서당을 강력하게 단속하여 90%가 넘는 학령 하동을 문맹으로 만들었다. 교재도 총독부에서 인가하였고 1913년부터 교과서 편찬업무를 시작했다. 교과서에 일본 황실과 국가에 대한 관념을 강조하였다. 교육우ㅏ 궁극적 목적은 충량한 제국신민을 기르는 것과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을 한다는 것이다.
한국을 말살하여 한국인을 동화시켜 철저한 일본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식민정책의 근본이며, 밖으로는 무력으로써 한국인을 탄압하고 안으로 교육을 수단으로 하여 민족의식을 빼앗고 우리의 전통문화, 관습, 전통언어 모두를 말살하려는 정책이었다. 교육내용은 일조동조론(日朝同祖論)으로 조선과 일본의 조상이 같다하였고 내선일체를 주입하여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를 궁극적으로 실현하려 하였다.
한국의 교육연한은 11년~12년, 일본의 교육연한은 15년~17년으로 차이를 두어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이라 호도하였다. 일제는 통치초기에 일시동인을 부르짖고 천황의 적자로 선전하여 합병 10년 동안 식민지 교육을 철저히 시행했다. 이때에 황국신민회와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을 위해 일본어와 실과 교육을 중요시 하여 조선어와 한문과를 제외한 모든 학과의 교수 용어는 일본어이며, 교과서도 일본어로 편찬되고 일본어가 교내 생활에 상용어가 되었다.
일제는 공립으로 농업학교와 공업학교를 설립하고 간이실업학교(簡易實業學校)를 보급시켜 실무교육을 장려하여 식민통치를 위한 하급 기능직 전문가의 수요와 기타 정치적인 목적에 결부되어 시행하였다. 제복과 칼을 차고 교단에 섬으로서 위압감과 저들의 우월감, 위엄을 과시하고 일본정신과 문물을 주입시키고 한국 민족정신을 말살하고자 했다. 일제는 이나라 민족에게 교육적 차별대우를 했다.
그 이유는 ① 정치적인 고려에서였다. 교육의 증가는 욕구의 증가로 연결되고 이는 정신 욕구와 연결되어 정치적 독립을 갈망하게 되기 때문에 식민지 백성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박탈했다. ② 근대화 과정에서 뒤떨어진 한국민을 멸시하고 한국민을 열등민족으로 생각하는 일본 민족의 우월심이 작용했다. ③ 경제적 고려가 있었다. 일본과 동등한 교육제도를 실시하면 거액의 교육비가 투자되어야 하니 식민지 국민에게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발상이다. ④ 실리적인 고려에서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대륙진출을 위해서 그들에게 사역될 수 있는 노동자이다. 한국민에게 필요한 교육은 명령에 복종하는 인간,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제공의 봉사성을 가진 사람이면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의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미션 계통의 선교사가 경영하는 사립학교로 1911년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하여 감독을 한층 강화했다. 1915년 다시 개정하여 사학 취체에 열을 올렸다. 교원자격, 일어통용, 설립자, 교장, 교원의 당국허가, 교과용 도서는 일제당국에게 편찬한 것, 검정을 받은 것을 사용하고 교과과정에서 역사와 지리를 삭제하여 우리의 역사의식과 주체의식을 말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총독부는 일인 교사 채용 강요, 교수 내용과 일어 사용, 상황감독, 교수와 학생의 사상적 동향감시로 탄압을 가하였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여 우리 조상들의 잘못된 행위들만 집대성하여 나열하고 일본 역사는 호화찬란하게 꾸며 한국인 스스로 열등감감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기 민족을 멸시하고 영원히 자립할 수 없는 민족이라는 패배 의식을 갖게 하려 했다.
그러나 문맹정책이 점차 완화되어 공립 보통학교가 6면 1교제에서 3면 1교제로 개선(1919년)되고 다시 보통학교의 1면1교제(日面一校制, 1929년)가 시행되었으나 우리 민족에 대한 교육이 양적으로는 증가되나 질적으로는 오히려 악화되어 한국인에게 한국어, 한국사, 한국지리의 공부를 못하게 원천적으로 교육기치부터 봉쇄해 버렸다.
1939년 3월 다시 조선 교육령을 개정하여 황국신민화를 철저히 추진하였다. 1943년 3월 조선교육령을 근본적으로 개정하여 수업 연한 단축과 황국의도를 기본정신으로 삼았다. 체육시간을 교련시간으로 대체하여 학교를 전시체제로 전환시킨 이른바 결전교육(決戰敎育)을 시켰다. 사립학교 재산을 차압하고 한국인 간부와 교수를 추방하여 일본인 사학관과 교장을 파견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1942년 1월 학도지원병을 모집하고 1943년 5월 강제징병제도를 실시했다. 학생들은 학업을 그만두고 숨거나 학병으로 전장에 끌려갔다. 1945년 5월 학생의 결전 태세 확립을 위한 전시 교육령을 공포하고 8월에는 학도대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1934년도 남해군의 교육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육의 효율적인 실시를 위하여 학교조합을 결성했다. 이 명칭은 남해학교조합이며, 구역은 남해면이고 호수는 36호 인구는 남자 59명 여자 59명이다. 미조학교조합의 구역은 삼동면(미조 ·송정·상주)이고 호수는 59호 인구는 남자 99명 여자 105명이다. 이 학교조합들의 재정구조는 (1934년도) 세입면에서 보면 조합비 1,031원, 사용료 및 수수료 143워느 재산수입 13원, 이월금 180원, 과년도 수입 30원, 보조금 3,000원, 잡수입 26원, 합계 4,693원이었다.
학교조합의 세출면에서 보면 사무비 547원, 회의비 21원, 소학교비 3,780원, 기본재산조성비 67원, 재산관리비 71원, 과년도 지출 100원, 잡지출 22원, 예비비 85원 합계 4,693원이었다.
학교조합의 세출면에서 보면 사무비 547원, 회의비 21원, 소학교비 3,780원 기본재산조성비 67원, 재산관리비 71원, 과년도 지출 100원, 잡지출 22원, 예비비 85원 합계 4,693원이었다. 1934년도 학교는 다음과 같다.
- 공립농업실수학교 : 학교수는 1, 학급수 2, 교원(교수 또는 훈도) 3명, 학생수 남자 84명, 1년 경비 6,318원
- 공립심상소학교 : 학교수 2, 학급수 2, 교원(교원 또는 훈도)2명, 기타, 2명, 학생수 남자 26명, 여자 23명, 1년 경비 53,761원.
- 공립보통학교 : 학교수 8, 학급수 42, 교원(교원 또는 훈도)40명, 기타 8명, 학생수 남자 2,328명, 여자 330명, 1년 경비 53,761원.
- 공립보통학교 부설 간이학교: 학교수 2, 학급수 2, 교원(교수 또는 훈도) 2명, 학생수 남자 72명, 1년경비 2,093원, 공립보통하교 분교장 학생수 1, 학급수 1, 교원(교수 또는 훈도)1명, 학생수 남자 59명, 여자 13명, 1년 경비 7,344원
- 시설학술강습회 : 학교수 7, 학급수 8, 교원·기타 8명, 학생수 남자 287명, 여자 116명, 1년 경비 884원
- 서당 : 학교수 10, 학급수 10, 교원·기타 10, 학생수 남자 247명, 여자 5명, 1년 경비 618원이었다.
1934년 남해군 학교비는 다음과 같다.
- 세입면에서 경상비로 부과금 14,758원, 사용료 및 수수료 12,498원, 재산수입 3,421원, 잡수입 1,224원이고 임시비로 이월금 3,200원, 보조금 26,791원, 기부금 22,468원, 과년도 수입 394원이다.
- 세출면에서 경상비로 평의회비 251원, 보통학교비 52,101원, 농업실수학교비 6,236원, 간이학교비 3,429원, 기본재산조성비 68원, 재산관리비 892원, 학교비취급비 1,965원, 잡지출 480원, 예비비 500원이고 임시비로 보통학교비 16,960원, 농업실수학교비 2,070원이다.
1934년 남해군 향교 재단 경비는 다음과 같다.
- 세입면에서 재산수입 652원, 잡수입 435원, 이월금 500원, 기부금 1원이다.
- 세출면에서 문묘비 1,338원, 지방교화비 45원, 재산관리비 108원, 사무비 48원, 재산조성비 4원, 기부 및 보조 33원, 예비비 18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