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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근대

일제강점기 상공업, 금융, 광업

내용
일제강점기 상공업, 금융, 광업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상공업

 

19세기 말부터 교통, 통신의 발달은 조선의 상업을 일변시켜 대도시에는 백화점 같은 산매상이 등장하고, 매집상(買集商), 중계상, 도매상이 나타나 상품의 유통속도가 빨라졌다. 5일장은 존속되었고, 남해도 3개의 5일장(읍내시장, 창선시장, 무림시장)이 존재했다.

사설시장, 공설시장, 어시장, 곡물거래시장 등 모두가 일본인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전근대적인 우(牛)시장, 5일장은 조선인의 중심시장이었다. 상업에서 대경영자, 수출입업자는 모두 일본인이 독점하였으며, 수입상품은 80%가 오사카에서 수입되었으며, 조선은 부산을 통하여 수출입되는 무역품은 대일거래가 90%이상 차지했다. 

수입품은 쌀을 수탈해가서 그 절대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수수, 조, 콩 등의 잡곡식과 휘발유, 석유, 기계, 모직물 등 여러 가지 공제품이었다. 수출품은 쌀, 우피, 소금, 생선, 건어, 해태, 흑연, 도자기, 한지 등이었다.

정치, 경제적 조건이 유리하였던 일본상인은 원료의 수입과정과 제품의 판매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였다. 대신 조선상인은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였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이란 조선으로 하여금 상품을 판매하고, 공업원료와 식량을 획득하는 시장 역할을 발휘시키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시경기를 타고 급상승하였던 일본경제가 대전 종료와 함께 급강하하여 불경기에 빠졌고 그 치유책으로 조선에 유휴자본을 진출시켜 공장건립으로 불경기를 타개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과 관세제도를 개선하여 일본자본 진출의 길을 자유화시켰다. 한국인의 풍부한 노동력, 저렴한 임금, 장기간의 노동은 일본 자본가들의 유리한 투자조건이었다. 만주사변이후 군수사업 개발이 더욱 요청되자 한국을 중국침량 병참기지화 하여 공수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하였다.

남한에는 식량생산과 경공업 중심, 북한에는 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약간의 중공업을 육성시켰다. 한국인의 기업 활동은 극히 미미했고 소자본에 의한 양조, 제분, 정미업과 약간의 방직공업에 종사할 뿐이었다. 그래서 민족자본의 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균형된 산업발달도 없이 일본의 생산체계에 의존하게 되었다. 한국인의 기업 활동은 억제되고 한국인의 자본 축적과 기술발달은 저지되었다. 따라서 한국공업은 생산계열의 기형성과 공업생산의 후진성을 모태로 하여 공업생산 관계는 자립성이 결여되었다. 한국은 단지 일제의 병참기지로 전락했다.

이 때 남해의 현황을 살펴보면(1934년 8월 당시) 공산품의 생산량은 직물로써 무명베의 생산 수량이 56,560반, 가격 79,181원, 제조호수 13,389호, 삼베의 생산수량이 61,446반, 가격 110,600원, 제조호수 13,644호, 모시베의 생산수량이 40,415반, 가격 80,790원, 제조호수 10,581호, 명주베의 생산수량이 3,635반, 가격 10,177원, 제조호수 1,581호였다.

고공품(藁工品)으로써 새끼의 생산수량이 610,321관, 가격 61,032원, 제조호수 14,118호, 짚신이 생산수량이 506,500족(足), 가격 20,268원, 제조호수 14,114호, 가마니의 생산수량이 39,778매, 가격 3,978원, 제조호수 1,300호, 돗자리 생산수량이 27,132매, 가격 1,628원, 제조호수 1,250호이다.

주류는 탁주 생산량이 2,339.1kg으로 금액은 207,763원, 양조장은 25개소, 밀가루는 생산량이 28,125kg이며, 금액은 6,750원, 제조호수 6,158호, 누룩은 생산량이 100,628개 금액은 14,389원, 제조호수 1호, 시장은 읍내시장의 경우 연중 시장을 여는 횟수는 72회였다.

연중 매매량은 농산물이 20,000원, 직물이 68,000원, 축산물이 72,000원, 잡화 2,000원 정도이고 창선시장의 경우 연중 시장을 여는 횟수는 70회이고 연중 매매량은 농산물이 6,700원, 수산물이 2,640원, 직물이 7,042원, 축산물이 7,393원, 잡화 5,510원 정도였고 무림시장의 경우 연중 개시 횟수는 39회이고 연중 매매고는 농산물이 19,000원, 수산물 4,680원, 직물 3,500원, 축산물이 712원, 잡화 9,500원 정도이다.

1920년 일제는 한국과 일본 관세제도를 통일하고 이입세(移入稅)를 존속시켰다. 즉 한국을 일본 관세 지역에 포함시켰다. 일부 물품의 수입에 대하여 무세, 차별과세 하는 특례를 두고 역내무역(域內貿易) 중, 한국의 관외 이입세를 존석시켰으며, 또한 역내 소비세 및 관세부담을 위해 한국에 출항세(出港稅) 제도를 설치하여 한국 무역에 제동을 가했다. 이입세의 존속은 국내의 일본인 공업보호 육성과 한국 내 일본인 투자이익 증대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한국인의 부담에 의한 재정수입 확보에 그 이유가 있었다.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이입세를 폐지함으로 저렴한 원료 및 원료용 제품 획득과 한국으로부터 일본의 소비사업 보호를 위해 완제품 이입을 규제하기 위해 출항세를 신설하였다. 즉, 한국으로부터 저렴한 원료획득, 한국 내 일본인 사업 보호육성 일본국내 산업보호를 위하여 한국을 희생시켰다.

1923년 주정 및 주성함유 음료 직물을 제외하고는 이입세를 폐지했다. 이 이유는 제1차세계대전 중 전시경제로 인하여 확대된 생산능력을 전부 발휘하여 내수를 초과하는 화물을 전부 수출시키기 위해서였다.

1930년대 일본의 정치목적을 위한 한국경제 이용, 경제종속, 일본자본의 한국 진출 결과로 급격히 수입이 증가되고 수출이 저하되어 무역적자가 발생하였다. 이 무역적자는 곧 한국에 대한 일본 투자의 한 방편이요 식민지 수탈의 수단이었다.

무역상품 구조면으로 볼 때 원료수출, 제품수입의 형태였고 수입품의 절반이상이 완제품이었고 한국산 쌀을 대량 일본에 강제 수출한데서 생긴 한국의 식량공급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식료품의 수입비중도 증가했다.

수출입 상품 구조는 한국경제에 의존적이며, 후진적 구조를 강제했고 유한한 자원의 유출, 고갈을 조장하고 자주적 성장을 위한 생명력을 잔인하게 파괴시켰다.

1934년 남해군의 수출입 상황을 살펴보면 수출면에서 현미는 수출량 4,529석, 가격 92,125원, 면화는 수출량 204,251근, 가격 24,335원, 가마니 수출량 39,776매, 가격 3,937원, 물고기류는 수출량 12,294,425kg, 가격 544,735원, 어교조(漁鮫槽) 수출량 4,000척, 가격 40,000원, 누에고치 수출량 441석, 가격은 14,690원, 직물 수출량 63,285반, 가격은 114,121원이었다.

남해의 수출물량을 구조적으로 살펴보면 군수물자이며, 생필품으로 대대적 권장 품목인 면화를 가동도 하지 않고 수출하고 원시생산품인 가마니 비록하여 청정해역에서 나는 물고기, 그리고 땔감, 숯재료, 쌀보리 등 원료상품이 대부분이었으며, 주식료품은 쌀과 쌀보리 였다. 쌀을 세분하여 고찰해 보면, 남해군 쌀 생산량은 맵쌀, 찹쌀, 산두벼 모두 포함하여 52,820석으로 당시 부족분은 콩, 조, 옥수수, 초근목피로 생명을 연장했다.

남해에서 수출된 직물은 현대적 의미의 직물이 아니라 모시베, 삼베, 무명베 등의 수출이었다. 명주실이나 그것으로 짠 견직물이 아닌 누에고치 그대로 수출하였고 무명베가 아닌 면화를 그대로 수출하였다. 그래서 견직물 면포, 마포는 수입해야만 하는 식민지 수탈 경제정책이었다.

한편 수입면을 살펴보면(1934년), 소금 수입 수량이 1,678,575근, 수입가격 27,000원, 고무신 수입 수량 52,850족, 수입가격 26,425원, 비료 수입 수량 600톤, 수입가격 47,063원, 석유 수입 수량 4,256상자, 수입가격 25,526원, 견직물(명주실로 짠 비단) 수입물량 5,250반, 수입가격 18,375원, 무명베 수입물량 16,545반, 수입가격 39,708원, 삼베 수입물량 985반, 수입가격 2,561원, 모직물 수입물량 540반, 수입가격 3,240원, 시멘트 수입물량 2,560준(樽), 수입가격 8,960원, 중국모시 수입물량 9,150원, 중국모시 수입물량 9,150관, 수입가격 22,875원이었다.

 

▶ 금융

 

한일합방 후 한국의 금융기구는 일본에 의해서 식민지 경제지배의 기본수단 중 하나로 전개되었다. 금융기관의 대표적인 것은 은행이다. 이 은행은 특별법에 의한 특수은행, 은행령에 의한 저축은행령에 의거한 저축은행, 은행이외에 신탁회사, 금융조합, 동양척식주식회사, 보험회사 등이 있었다. 1911년 조선은행이 설립되어 한국 중앙은행으로서 금융계를 지배하고 일본의 만주침략 첨병 역할을 하였다.

특수은행으로 조선식산 은행이 부동산 농공업에 대한 장기자금을 공급하였다. 한국에 본점을 둔 6개의 보통은행과 일본에 본점을 갖고 한국에 지점을 둔 3개의 보통은행이 있었다. 은행 이외에 그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은 금융조합이다. 총독부는 농촌의 금융기관인 금융조합을 농촌 지도기관으로 만들어 그들의 정치적 선전도구로 적극 육성하였으며, 조합의 이사장 및 이사의 임명권까지 총독부에서 장악하여 식산은행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외에 신탁회사, 보험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금융부 등이 있어 한국의 식민지적 지배를 위한 금융적 뒷받침을 하였다. 은행의 대출금은 산업 자금으로 농업 자금이 압도적이었고 상업 자금 대출의 반 이상이 살 금융으로 구성되어 한국을 제1차 산업 부분을 중심으로 개발하여 일본 경제의 종석적인 경제구조를 만들려고 했던 일본의 기본 정책에 대응한 금융형태이다.

조선 식산은행과 전국적 규모로 조직된 금융조합은 조선총독부의 감독 하에 있으면서 총독부의 식민지 경영정책에 금융적인 뒷받침을 하였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식산은행 금융조합 등 그들이 직접 감독하는 은행을 통해서 일본자금을 도입하였고 그 은행들을 통해서 식민지 경제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자금을 공급하였다. 

남해에는 금융을 다루는 기관은 1934년을 기준으로 보면, 남해금융조합(남해면 북변동), 무림금융조합(이동면 무림리), 해양금융조합(남해면 북변동), 삼천포금융조합창선지소(창선면 수산리), 남해산업조합(남해면 북변동), 남해우편소(남해면 서변동), 미조우편소(삼동면 미조리)였다.

그리고 저축 현황을 보면 금융기관에 저축한 일본인은 인원 75명, 금액 26,759원, 일인당 356원, 한국인은 인원 6,190명, 금액 140,923원, 일인당 23원, 단체저금은 인원 107명, 금액 138,367원, 일인당 1,293원이었다. 우체국에 저축한 일본인은 660명, 금액 36,560명, 금액 6,850원, 일인당 978원이었다.

 

▶ 광업

 

한국의 광업권은 일본인에 의해 독차지 되고 지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 광업은 불황을 겪는다. 광산물 중 흑연, 금(金)과 지금(地金 : 제품화 하지 않은 금)은 전량 모두 일본에 이출되었고 철광 무연탄은 반 이상이 일본에 수출되었다. 만주사변 이후 국제 정세의 긴박화와 일본의 금 수출 재 금지로 금값이 폭등하고 일본의 준전시 체제로 한국의 광물자원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중일전쟁 발발로 광업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광산물 연 산출액은 매년 증가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광업은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비약적 발전을 한다. 일제치하 한국 광업은 원광석 - 제철 - 정광 - 가공 - 제품이라는 유기적 관련성이 없이 일본 공업에 단순히 원료를 제공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 후유증으로 해방 후 한국의 경제건설에 치명적인 큰 지장을 주었다. 남해의 광업 현황은(1934년 8월 당시) 광구수는 5개소, 광구면적은 9,136,822㎡, 광구세는 1,600원이었고 광산물의 종류는 금(金), 은(銀), 연(鉛), 아연, 수연이였으나 광산량이 없어 광산세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