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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근대

일제강점기 경제정책

내용
일제강점기 경제정책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농업

 

일제 경제침탈정책은 4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 1단계는 한일합병 후부터 제1차세계대전까지 1910대로 기초산업 및 근대적 토지제도의 확립 단계, 제2단계는 3·1운동 이후부터 1930년까지 1920년대로 미곡중심 산업구조 재편성단계, 제3단계는 1930년대로 조선의 공업화와 농촌진흥의 단계, 제4단계는 1940년대의 농공병진(農工竝進)과 대륙침략의 단계이다.

 

(1) 제1단계

1910년대는 근대적 토지제도의 확립기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일본은 근대적인 토지소유제도를 조선에 도입한다는 미명하에 조선의 전통적인 토지 사용방식인 경작권과 수조권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토지조사사업에서 현실적인 토지 보유자들인 경작자들은 배제되었고, 봉건적인 토지소유자인 수조권자(收祖權者)를 근대적 사유권자로 인정하였다. 농민은 자유계약에 의한 지주와 소작농으로 새롭게 관계를 상정하여야 했고 절대다수의 농민들은 소작농민으로 전략했다.

일본은 종래의 공전들인 오아실, 각 관청 및 지역공동체 소유의 토지들을 국유지로 편입시켰다. 그 결과 일본 자본의 토지투자촉진으로 일본인의 토지집중현상을 초래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토지를 겸병하여 대지주로 등장하였다.

여기에 무리한 수리조합(水利組合)의 수리사업으로 고율의 부담금액과 고율의 소작료로 조선농촌경제를 파탄시키고, 농민을 궁핍화시켰고 농촌을 유린했다.

 

(2) 제2단계

 

본격적인 상품과 자본수출의 단계로서 일제는 토지 투자에 적극 개입하여 미곡증산을 위한 산업구조 재편성작업에 착수하였다. 일본은 공업원료와 식량공급의 증대가 절실히 요청되자 조선을 식량공급기지로 하여 미곡증산, 품종개량, 토지개량, 자급비료, 관개시설의 확장사업을 시작했으나 산미증산계획의 차질로 1926년 계획을 개정하였다.

그래서 기성답(旣成沓)의 관개개선(灌漑改善)으로 밭을 논으로 지목변환시키고 개간, 간척사업을 벌여 산미증산을 계획했으나 역시 조선인의 농가경제 향상, 농민생활 안정은 전혀 무시된 일본인 위주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국내 미곡의 일본 이출이 급격히 증가하여 조선인은 극심한 식량부족으로 만주에서 조를 수입하여 굶주린 배를 채웠다.

일제는 우리 생산량의 반 이상을 일본으로 이출하여 조선인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0.3804석, 일본인은 1,026석이었다. 따라서 조선인은 조, 콩, 옥수수, 안남미, 콩깻묵으로 목숨을 연장해야만 했다.

 

(3) 제3단계

 

조선공업화의 추진단계 첫째가 국민생활의 필수품이며, 중요한 군수품인 면화의 장려이다. 또 하나는 면양의 사육장려 즉 남면북양(南綿北羊)정책이다. 이것은 일본이 1920년대 말 대공황을 겪으며 돌파구로써 마련한 것으로 조선농촌경제의 실질적 향상은 배제된 정책이다. 셋째가 농공진흥과 자력갱생운동이다. 이는 조선인의 민족주의 각성과 민족항거운동을 일본의 통치권을 바탕으로 한 조선과 일본의 제휴방향으로 사상전향을 꾀하는 선무공작이었다. 세부항을 보면,

① 농가의 경제갱생의 구체적 방안을 본위로 하고 정신 생활적 의의를 충분히 밝힐 것

② 소유노동력의 완전소화

③ 자급자족의 원칙

④ 식량충실 농가지수 균형 부채근절을 목표로 하였다.

이의 지도 방법으로 관리와 공공단체의 지도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이 운동의 목적도 우리의 항일사상을 친일적으로 전환시키는 정신적 회유책과 일본의 국제적, 경제적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의 제국주의 농업정책은 농촌 파멸을 초래하여 농가부채를 증가시켰고, 이 부채는 일제의 고리대 자본으로 농민은 돈 때문에 농노로 전락한다.

 

(4) 제4단계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농업정책도 전시체제인 농공병진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식량수급이 심각해지자 산미증산계획을 수립하여 군량미 중산에 박차를 가했다. 토지개량사업과 경종법 개선에 의한 증산을 서두르고, 농기구 보급으로 농촌 기계화를 꾀했다.  그러나 농공병진정책은 공업에 농촌의 과잉노동력이 흡수되면서 농촌 노동력 부족현상을 초래하였고, 전쟁도구로써 청장년을 징용·징병하여 농촌 노동력의 부족현상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또 강제 공출로 농산물을 헐값인 공정가격으로 착취함으로써 농민의 생산의욕이 감퇴로 농업생산량이 격감하였다.

이상과 같이 일본이 조선에서 실시한 농업정책은 일본 자본 축적을 위한 식민지라는 기본적 전제위에서 출발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교두보로 조선인의 농토를 강제로 수탈하여 일본인 주민에게 나누어 주고, 또는 개간되지 않은 간석지(干潟地 :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 초생지(草生地 : 풀이 무성하고 물이 고인 땅), 원야(原野 : 인가가 없는 넓은 들), 소택(沼澤 : 땅바닥이 저절로 큼직하게 둘러빠지고 물이 고인 곳)을 대부하여 농토를 만들어 식량증산을 채찍질 하였다. 그 현황은 1935년 9월말 현재로 국유 미개간지 대부 총면적은 간석지가 45,290.7정보, 초생지가 1,882.6정보, 원야 2,512.2정보였으며, 국유 미개간지 대부 현재 면적은 원야가 1,512.5정보였다. 국유 미개간지 지목별 부여 면적은 논(畓) 45,290.9정보, 밭(田) 1,342.8정보, 기타 1,532.4정보였다.

농업을 목적으로 한 공유수면 매립면허 총면적은 간석지가 6,392.2정보였다. 공유수면매립 지목별 면적은 논 15,732.7정보였다. 일제는 일본으로 식량 이출을 위하여 식량증산에 혈안이 되어 간석지 소택, 초생지, 원야 등의 개간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한편 남해군에 1934년 현재 자작농지로 설정된 것은 그 면적이 논 3,180.3정보, 밭 992.1정보이다.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논 6,604원, 밭 502원 이의 대부 금액의 총액은 5,106원이고, 1호당 대부 금액은 2,552원이었다. 이의 일호당 면적은 논이 392.3정보, 밭 121.4정보였다. 1934년도 남해군 농정현황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경지면적은 1모작 논이 105.11정보, 2모작 논이 414.82정보, 밭이 308.7정보였으며, 농가호수는 일본인으로 전업으로 하는 자 2호, 겸업으로 하는 자 1호, 조선인으로 전업으로 하는 자 12,966호, 겸업으로 하는자 1,148호, 중국인으로 전업으로 하는 자 1호였다.

이것을 영농종별(營農種別) 농업호수로 분류하면 자작농가가 7,616호, 자작 겸 소작농가가 1,990호, 고용되어 농업에 종사하는 자가 161호였다. 쌀의 파종 면적은 맵쌀이 495.78정보, 찹쌀이 24정보, 산두벼 2정보이었고, 쌀의 수확량은 멥쌀이 50,824석(石), 찹쌀이 1,983석, 산두벼 13석이었다. 

보리의 파종면적이 보리 53.26정보, 밀 43.26정보, 나맥(裸麥 : 쌀보리) 588.88정보였으며, 보리의 수확량은 대맥(大麥 : 보리) 7,501석, 밀 3,903석, 쌀보리이 56,692석이었다. 

콩(豆)류의 파종면적은 콩 107.0정보, 판 60.7정보, 기다 80.1정보 콩류의 수확고는 콩 6,197석, 팥 218석, 기타 635석이었다. 잡곡의 파종면적은 조(粟) 44정보, 피(㮨) 0.9정보, 서(黍 : 기장) 0.2정보, 수수 6.9정보, 옥수수 2.5정보, 메밀 42.2정보, 잡곡의 수확량은 조 456석, 피(㮨) 6석, 서 2석, 수수 50석, 옥수수 20석, 메밀 343석이었다. 특용작물 파종면적은 국민의 의복생활에 필수적이고, 중요한 군수품인 면화의 재배를 적극 장려하고 더 나아가 호별로 할당하여 강제로 재배를 시켰다. 

면(綿) 158.1정보, 삼 0.814정보, 모시 2.52정보, 깨 10.3정보, 참깨 20정보, 완초(莞草 : 왕골) 0.91정보였으며, 특용작물 생산량 면 1,463.181근(斤) 삼 42,955관(貫), 모시 3,111관(貫), 깨 55석, 참깨 68석, 왕골 2,222관, 채소류의 파종면적은 고구마 99.1정보, 감자 0.5정보, 배추 33.1정보, 오이 14.8정보, 무 62.4정보였으며, 소채류의 수확량은 고구마 251,535관, 감자 1,250관(貫), 무 22,220관, 배추 84,866관, 오이 32,850관이었다.

양잠업을 살펴보면 이미 설치되어 있는 뽕밭은 26.5정보이고, 신설 예정인 뽕밭은 1.8정보이다. 양잠업에 종사하는 호수는 3,355호, 가을누에 1,432호, 종란의 매수는 개량종으로 봄누에 1,829매, 가을누에 485매이며, 누에고치의 생산량은 봄누에고치 627석, 가을누에고치 243석이었다.

일본은 농촌진흥과 자력갱생운동으로 조선의 민족주의 각성과 민족저항운동을 일본통치권을 바탕으로 한 한일제휴의 방향으로 사상 전향시켜서 회유하는 방편으로 남해군에 16개의 농업갱생지도마을을 선정(1934년 3월말 당시)하여 농촌진흥과 황국신민화정책에 끌어들이려했다. 형식은 농촌진흥이었으나 내용은 선무공작으로 관공서 공무원과 공공단체의 지도자 강습회를 통해 일본의 국제적, 경제적 우월성 확보와 지위 향상에 이용했다. 결국 일본제국주의 농업정책은 농촌을 파멸시키고 농민을 노예로 전락시켰다.

갱생지도마을은 아래와 같다.

 

● 남해면 → 입현 (笠峴 : 설치년도 1933년 8월, 갱생지도 호수 20)

               차산 (차산 : 설치년도 1993년 9월, 갱생지도 호수 20)

● 이동면 → 무림 (茂林 : 설치년도 1933년 8월, 갱생지도 호수 20)

               성현 (城峴 : 설치년도 1933년 9월, 갱생지도 호수 20)

● 삼동면 → 지족 (知足 : 설치년도 1933년 8월, 갱생지도 호수 20)

               동산 (東山 : 설치년도 1993년 9월, 갱생지도 호수 20)

● 남  면 → 율곡 (栗谷 : 설치년도 1933년 8월, 갱생지도 호수 20)

               하촌 (下村 : 설치년도 1993년 9월, 갱생지도 호수 20)

● 서  면 → 서호 (西湖 : 설치년도 1933년 8월, 갱생지도 호수 20)

               남상 (南上 : 설치년도 1993년 9월, 갱생지도 호수 20)

● 고현면 → 도마 (都馬 : 설치년도 1933년 8월, 갱생지도 호수 20)

               오곡 (梧谷 : 설치년도 1993년 9월, 갱생지도 호수 20)

● 설천면 → 남양 (南陽 : 설치년도 1933년 8월, 갱생지도 호수 20)

               문의 (文義 : 설치년도 1993년 9월, 갱생지도 호수 20)

● 창선면 → 상죽 (上竹 : 설치년도 1933년 8월, 갱생지도 호수 20)

               부윤 (富潤 : 설치년도 1993년 9월, 갱생지도 호수 20)

 

일본은 근농공제조합(勤農共濟組合)을 남해에 12개나 만들어 조선인에게 양계, 농우 구입, 양돈새끼, 가마니틀, 베틀, 어구 구입과 토지구입 양봉을 위하여 돈을 대부하여 주었는데, 형편없이 비싼 고리대금이었다. 대부액과 차액이 무려 5,362원이었다. 여기에 고리채를 붙여 일본은 조선의 농민들을 경제적으로 수탈해 갔고, 또 자력갱생사업으로 정신적 세놔작업을 병행시켜 나갔으며, 공출이라는 제도 하에 농산물을 강제 징발해 나갔다.

한편 비록 초보적인 기계지만 수동 베짜는 기계가 남해군에 들어왔다. 이에 따른 기계와 생산품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 재래 직기(織機)는 수량이 10,305대이고, 개량 수직기(手織機)는 163대, 족답(足踏) 직기는 175대, 개량 죽성(竹筬) 1,583매

- 무명배 제조호수 13,389호, 생산수량 56,560반, 생산가격 78,181, 판매수량 15,001반, 가격 21,001원, 자가 소비량 수량 41,519반 가격 58,181원

- 삼베 제조호수 13,644호, 생산수량 61,446반, 110,600원, 판매수량 22,817반, 가격 41,065원, 자가용 수량 38,629반, 가격 69,337원

- 모시베 제조호수 10,644호, 생산수량 40,415반, 생산가격 80,790원, 판매수량 24,215반, 가격 48,548원, 자가용 수량 2,387반, 가격 6,668원

- 명주베 제조호수 1,581호, 생산수량 3,635반, 생산가격 10,177원, 판매수량 1,252반, 가격 3,509원, 자가용 수량 2,387반, 가격 6,668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