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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선 말기 농민항쟁의 평가

내용
조선 말기 농민항쟁의 평가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조선 말기 농민항쟁의 평가

 

(1) 민심을 버린 황실과 세도정치가 농민항쟁으로

 

정조는 권력을 위해서는 물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설치되어 있는 훈련도감이나 어영청, 금위영, 수어청 등은 모두 왕의 직속군대였지만, 권신들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조 자신의 군사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장용영을 설치하고 곁에 두었다.

1798년에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를 지어 왕권의 절대성을 강조 하였지만 정치 운영 논리와 제도 자체를 개혁하려고 하지 않았다. 규장각을 설치하고 젊고 똑똑한 문신들을 선발하여 개혁정치를 펼쳤으나 그 과정에서도 자기가 특별히 총애하는 관료들에게 물어보고 그들의 의사에 따랐다.

정조는 당대의 대학자인 김조순의 딸을 세자와 혼인시키기로 하고 김조순에게 세자의 보호를 맡겼다. 그리고 김조순의 학문 능력과 김상헌의 후손이라는 가문의 후광을 왕권강화에 이용하려 하였다. 그런데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자 증조모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정순오아후는 정조의 비호를 받던 시파를 몰아내고 벽파를 등용하여 정국을 운영했다. 이때 김조순은 시파였으나 정순왕후를 도와 딸을 순조의 비로 삼았다. 그러나 순조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親政)을 할 때, 순조의 구상에 걸림돌이 된 것은 김조순과 그의 일족이었다. 순조는 이러한 장애를 넘지 못하였고 세도정치는 더욱 악화되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그 후 효명세자가 갑작스럽게 죽자 효명세자의 아들이 8세로 헌종에 즉위하여 풍양조씨가 집권하였고 다음대에 철종이 즉위하자 다시 안동김씨가 집권을 하였다. 세도정치를 시행한 세력은 달랐으나 그 병폐는 변함이 없었다. 세도정치는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무너졌다.

대원군의 기본 목적은 왕권강화였다. 따라서 양반세력을 약화시키는 것과 왕실의 위엄을 되찾는 것이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이러한 목적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경북궁 중건사업이었다. 대원군은 재정이 허락하지 않는 상황에서 각종 잡세를 신설하고 원납전을 발행하는 등 재정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경기도 주민들을 징발하여 경북궁 중건사업을 강행하였다.

1873년에 대원군의 섭정을 물리치고 친정을 시작한 고종은 민씨 세력을 중용하였으나 1876년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을 하게 되었다. 영국등과 연이어 수교를 맺으며 서양문물의 도입을 위해 노력했으나 서양문물의 전래과정에서 소외된 구식군대의 반란인 임오군란이 1882년에 일어났다. 임오군란을 다스리기 위해 대원군이 재등장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고종과 민비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즉, 고종과 민비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자기나라로 불러들이고 자기 나라 백성들의 생명을 청국 군대수중에 맡겼다. 갑오농민전쟁이 벌어지자 다시 청나라 군대가 출병하였고 일본은 갑신정변(1884) 이후 체결된 텐진조약(1885)을 근거로 조선에 출병하였다. 청·일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에 의해 갑오농민전쟁은 좌절되었다.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막강해 졌다.

일본은 자기들의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일본의 간섭을 방해하는 명성황후를 살해하였고(을미사변)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비밀통로를 통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을 하였다. 그 곳에서 1년 동안 머물렀다(아관파천), 고종은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외국세력에 의존해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다. 그 결과 열강의 조선에 대한 이권침탈은 더욱 극심해졌고 나라는 피폐해졌다.

1897년 2월에 고종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새롭게 탄생한 대한제국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료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이용익(임오군란 때 민비를 업고 뛴 공로), 홍종우(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암살), 민영환(우피무역에 종사), 엄주승(엄비의 조카, 상인). 엄주익(상인), 이근택(보부상을 거느리고 정치폭력과 상거래로 부를 축적) 등이다. 조정의 최고기관인 의정부는 원로대신들로 가득 차 있었고 황실호위대(경위원과 황실재산관리소)인 내장원이 핵심 권력기구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재산을 늘릴 만한 일은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매관매직을 비롯하여 불공정거래라도 서슴없이 행하였던 것이다. 특히, 매관매직은 일상적으로 일어나서 지방마다 공정가격이 형성될 정도였다. 세금액이 많은 지역일수록 매직하는 금액은 상종가를 기록했고 대한제국 정부에서 재정개혁을 시도한다고 발표할 때는 매관맥직 가겨이 폭락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또한 황제는 흉년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자신의 조상들 묘와 제단을 꽃으로 단장하기 시작하였고 각곳에서 왕릉을 개수하고 전각을 짓는 사업을 벌였다. 비참하게 죽은 민비를 명성황후로 추대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면서 시작된 황실사업은 자신의 직계 조상인 사도세자를 기리는 능과 전각을 짓는 사업으로 연결되었고 사도세자를 감싸고 돌다가 역적으로 몰린 신하들의 가문에 상을 내렸다. 그리고 황제의 나라는 수도가 두 개여야 한다는 중국의 예에 따라 평양에 서경을 건설하는 사업으로 매년 재정적자의 규모가 증가하고 있었다.

지속된 흉년 등으로 농민들은 먹고살기에 어려우면서 전세(전정), 환곡(환정), 군역(군정)이라는 세금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정확한 세금 부담 내역을 가지고 징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총액제 수취 방법을 취하였다. 즉, 중앙에서 각도에 할당한 세금을 각 군현에 그리고 다시 각 마을에 일정하게 배분하고 마을에서는 각 가정에 할당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죽었거나(白骨徵布) 어린아이에게 세금고지서가 발부되는 경우(黃耆添丁)도 허다하였다.

이렇게 공동납 관행이 성립되자 지방의 서리나 수령은 이를 기회로 새로운 수탈방법을 모색하였고 이것을 도결이라고 하였다. 도결은 기존 세금 중에서 결손분이 있거나 또는 수령이나 서리가 임의로 유용한 부분을 도결이라는 이름으로 각 마을이나 각 가정에 일정하게 부과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상 또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부과하는 조세 때문에 상당수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농촌을 떠나 버리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는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자행되었기 때문에 분노한 농민들은 한사람같이 전국에서 항쟁을 일으켰다. 농민항쟁을 저지할 능력이 없는 조정에서는 외세의 힘을 빌면서까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고 결국 1910년 8월 29일에 주권을 강탈당하고 조선은 멸망하였다.

농민들의 저항을 불러온 것은 세금제도인 삼정(전정, 환정, 군정)의 문란에 있다. 그 중에 가장 심각했던 것이 환정, 즉 환곡문제였다. 환곡제도는 농민의 재생산기반을 보호하기 위한 곡물 비축제도로서 백성을 위한 제도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관청의 재정확보 수단으로 변질된다.

19세기 초에 연속적인 흉년으로 인해 환곡이 무상으로 분급되면서 비축미가 감소하였다. 그래서 진휼기능이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 악화된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환곡을 통한 수탈이 증가하여 각종의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재해가 심했던 해를 보면, 1809~1815년 사이, 1832~1838년 사이로서 역시 환곡의 감소도 초래하였다. 환곡 감소량을 비교해 보면 1807년 4도(경기, 경상, 강원, 함경도)의 총액은 4,796,380석인데 비해 1859년 환곡 총액은 3,803,114석으로 약 21%가 감소하였다.

이렇게 환곡의 감축으로 어려운 국가 재정임에도 불구하고 각 고을의 수령과 아전들의 수탈은 이를 계기로 통하여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부죽분에 있어서는 자비곡(自備穀)과 원납을 통하여 곡물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는 주민 수탈로 전가되었다. 예로서 1850년 경상도에서는 환곡 분급의 과다로 1호(戶) 혹은 1부(夫)에서 받는 환곡이 100석에 달했다고 한다.

흉년이 들면 1년간 징수가 연기되고 다음해에도 흉년이 들면 연기하여 3년 이상 연기하는 구환(舊還)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미징수곡을 읍미봉(邑未捧)이라 하는데 읍미봉의 연기를 허가받지 못하면 문서에만 존재하고 이자에 이자가 더해져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각 지역 수령은 환곡 징수에 책임을 지고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징수하였다고 보고하고 책임을 회피하였다. 이러한 환곡을 다음 해 봄에 다시 분급한 것으로 보고하여 문서상으로만 분급과 징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18세기 후반인 1776년에는 14.9%였는데 농민항쟁이 일어난 1862년에는 54.4%로 증가했다.

이럴 때는 징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탕감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징수하려 한 정책은 환곡을 수탈 도구로 변화시켰고 백성의 반발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된 이유는 각 지방의 수령에 대한 책임 문책 때문이란 점도 있다.

1698년에 편찬한 『수교집록(受敎輯錄)』에는 환곡을 제대로 징수하지 못한 수령은 녹봉과 해유에 구애되는 규정이 있으며, 이 규정 외에도 신체적 처벌 규정도 마련하여 환곡 징수 책임을 강화하고 있다.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에는 환곡을 기준대로 수납하지 못한 수령의 처벌에 고나한 규정에 의하면, 수납 성적이 끝이면 장형(杖刑, 決杖)에 처하고 끝에서 두번째는 추고한다고 하였다. 군향에는 한 단계 높은 규정이 적용되는데 끝이면 잡아다 심문하고 끝에서 두 번째는 장형에 처하고 세 번째는 추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환곡을 징수하지 못한 수령의 처벌이 강화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환곡 징수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곡의 감소는 지방재정을 악화시키고 있으며, 환곡의 징수가 미진할 때에는 수령의 지위까지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행 때문에 지방 수령은 삼정에 한 치의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흉년으로 인해 백성들의 고초가 심하여 환곡징수가 불가능할 경우 누적시키지 말고 정책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해결하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데 이러한 때를 기회로 삼아 오히려 없는 환곡을 더 붙이고 없는 잡세를 총동원하여 징수하려고 하니 백성들의 분노는 하늘 끝까지 닿았고 농민항쟁은 전국으로 퍼져 났다.

 

(2) 세도정치와 농민항쟁의 평가

 

19세기의 부정부패에 관해서는 간접적으로 통계자료에 밝혀진 바와 같이 백년동안 과거시험을 실시하지 않은 횟수는 단 7회뿐이다. 99.3%가 과거를 실시했고 1년에 3회 이상과거를 실시한 해도 3개년이다. 심지어는 1866년도에 한해에 5회까지 과거시험을 치른 바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전체 입격자 수와 19세기 입격자 수를 비교할 때, 19세기의 입격자 수가 33%를 차지하였다.

매관매직에 필요한 돈은 소과인 생원 진사에 3만 냥, 대과인 문과와 무과에 10만 냥이고 임지 부임시 수령은 1만 냥, 관찰사는 1백만 냥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관료와 세도가들의 비리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백성들의 저항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대되었다.

조선후기의 농민항쟁의 주동자나 의병장은 사사로운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국안민의 정신과 구국일념으로 활동한 것이다. 민란과 운동은 부정부패의 정치를 올바르게 이끌기 위한 수단이었고 방법으로는 힘은 약하지만 뭉치면 강한 민중들의 힘이 필요했다.

남해농민항쟁은 임술록에 기록되어 있지만, 탐관오리들과 착취자들의 이름 약간뿐이다. 항쟁의 주동자나 선창자 또는 권면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5일간의 남해농민항쟁 기간동안 부정부패한 관료와 세도가 37명의 집을 불태웠다.

갑오농민전쟁에 참전한 남해 출신의 동학접주 2명이 천도교 창건사에 기록되어 있다. 남해접주 정용태와 하동접주 여장협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장협은 하동 고승당산 전투에서 전사했고 정용태는 후일 갑진혁신운동까지 주도하다 세상을 떠났다. 지난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동학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공식적으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법률에 따른 세부조사도 필요하겠지만, 남해에서도 학술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호국정신을 계승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되겠다. 그리고 호국의 장소를 선정하여 이와 관련되는 시설물을 설치하고 교육의 장으로 홀용함으로서 후손들이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정신을 깨우칠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사업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첫째, 남해군민의 자생단체의 발족, 둘째, 남해군민에게 호국정신을 함양시키는 학술세미나 개최, 셋째, 농민항쟁이 발한 곳이나 활동한 곳에 홍보 시설물과 조형물 설치 등이다.

우리의 역사 정립은 현재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우리는 최대한 노력으로 정리되지 않은 역사를 정립한 후 후대에 물려주면 후학들은 잘못된 부분과 미흡한 부분을 정리하여 재정립할 것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