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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조선시대

갑오농민전쟁

내용
갑오농민전쟁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갑오농민전쟁

 

남해군 남면 당항리 우형마을에 거주하는 윤자신(尹自莘, 1924년생)의 증언에 의하면 "남해의 갑오농민전쟁 때, '우우통' 이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우우통'이란 갑오농민전쟁 때, 민중봉기 운동으로 악질관료와 지방수령을 끌어내어 응징한 것으로 풀어본다고 했다. 어릴 때 어른들에게서 들은바, 민중봉기로 악덕 현령을 끌어내어 짚 둥치에 실어 노량(설천면 노량리) 앞 바다에 띄워 버림을 일컬어 하는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우통의 발상지는 남해군 남면이라고 하면서 남면 면민은 남면에서 집결하여 서면 연죽리 삼거리에서 서면 면민과 합류하여 남해읍을 향하였고 이동면, 삼동면 지역 동쪽 면민들은 남해읍 죽산마을에 집결하였다고 한다. 군민 전체가 죽산에 모이게 되면, 현청으로 쳐 들어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남면은 동학농민군이 아닌 향약계에서 발의하고 주도하였다고 한다. 남면 죽전마을 한 할아버지나 항촌 할아버지가 우우통 우두머리가 되어 민중봉기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고현면에 있는 천도교 고현교구 남정포 도정을 역익함 고현면 대사리의 정도일은 "언제인지는 몰라도 고현면 탑동마을 음지고랑 정우진의 밭에서 덕석을 깔고 밥을 먹었다는 얘기를 어릴 떼 할머니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 사람들은 우통꾼이라고 했다"라고 증언하고 있고 남해읍 야촌마을 김재인은 "남해접주 정용태는 야촌마을에 거주하였고 문서에 사용했는지 다른 용도로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큰 도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1894년 11월 11일 하동 고승당산에서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1개중대 병력과 동학농민군이 대치하였는데 이 전투에 동학 남해접주 정용태는 수천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당시 동학의 접주는 최하 100호 이상을 지도자였다. 그만큼 남해에서 동학이 왕성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4대조 조상들이 동학을 신봉하는 더인이었냐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 이유는 도인이라는 것이 탄로가 나면 탄압을 받게 되고 죽음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족보에서 이름까지 삭제했다고 한다. 살아서는 이름을 바꿔 살았고 죽으면 암매장하거나 몰래 매장하고 묘비가 없도록 했다고 한다.

이렇게 생사가 불분명한 사람이 부지기수이니 남해의 동학교도의 숫자를 파악하기란 정말 어려운 실정이었다.

남해에 동학이 전래된 연도는 1893년이다. 진주 백락도의 수교인인 진주접주 손은석이 남해 여장협(당시 남해면 야촌 거주)에게 전도하고 여장협은 이종묵, 정용태에게 전도했다고 전하며, 정용태는 남해접주로, 이종묵은 대정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후일 여장협은 하동으로 건너가 하동접주가 되었다.

 

(1) 진주와 하동지역의 농민전쟁

 

동학의 제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동할 당시 경상, 전라, 충청등 하삼도는 물론, 경기도 지방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이때 경남지방에는 고성 접주 성한서, 울산접주 서군효 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경남지역에도 상당한 교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농민전쟁이 고부에서 발단되기 이전인 1892년에 진주 삼장 사람인 백락도(일본측 기록에는 백도홍)가 전라도 장수군에 있는 유해룡으로부터 도를 받고 돌아와 진주를 중심으로 점차 동학을 퍼뜨렸다.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의 동래 함양간 연도 탐문기(1894년 4월 28일자)에 "진주 영장은 민병 1,000여명을 모집하여 불우에 대비하고 동도 백도홍을 덕산에서 붙잡아 즉시 효수하고 나머지 도당 수십 명을 감옥에 잡아 두었기 때문에 잠시 진정되었다"라고 하였으며, 6월 13일자로 보고된 경상도내 동학당 동정에 관한 탐보에는 "지난달 진주지방에서도 인근 각지의 동학당이 봉기하여 매우 불우한 상태이나 얼마되지 않아 진정되어 백도홍을 비롯한 30여 명의 난도가 포박되어 그 후 무사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경남지역에서 백락도를 중심으로 농민전쟁이 이루어 졌으나 백락도가 잡혀 효수형을 당하였고 5월 7일에 전주화약이 체결되면서 동학농민군이 고향으로 귀향하였기 때문에 경남지역에서도 같이 행동하였던 것으로 보아진다.

3월 기포는 전주화약과 폐정개혁을 위한 집강소 설치 등으로 잠시 안정을 찾았으나 8월에는 하동의 유생 김진옥이 잔사 김영수, 수리 정찬주, 강윤수 등과 주동이 되어 민병을 조직하여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학살하는 행위를 하였다. 동학교도를 학살한다는 보고를 동학 영·호남의 대접주 김인배가 받고 순천에서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동원하여 민병을 응징하기 위해 하동을 공격하게 되었다. 하동군에서 발행한 『내고장의 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동부사 이남희는 1892년 각지에서 민란이 터지는 어수선한 정세 속에서 부임했다. 우리 고장은 강대한 동학 세력을 갖고 있는 전라도의 접경이므로 이런 민란을 방지하고 방지력의 강화를 위해 하동부 민포단을 조직하여 전 훈련원 주부 오위장인 화계사람 김진옥을 대장으로 삼았다. 

1894년 전라도 고부군에서 전봉준이 동학란을 일으켜 그 형세는 자못 높았으며 하동에서는 민포단의 민병을 증원시켜 동학의 난을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전재선, 수리 정찬두, 전좌수 강윤수, 전사과 김태권 등도 향병을 모집하였다. 1894년 7월 광양군 섬거의 박정주가 섬거의 동학도 100여 명을 거느리고 비밀리에 섬진강을 건너 하동읍 광평리에 잠입하여 여미의소라는 것을 설치하고 하동 동학 접주 여장협 등과 접선하여 동학혁명을 계획하게 되었다. 청년들에게는 입도를 권유하고 비밀리에 병기를 모았으며 농민들에게 재정 부담을 시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광양군 진상의 섬거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부사 이채연은 8월에 서울로 관군을 청한다고 떠난 후, 동학교도들은 이 소식을 염탐하고 9월초에 동도 두목 박정주가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섬진강을 건너 하동으로 도강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대비한 김진옥 등 관군과 민포단의 수천명은 안봉(하동읍 군청 뒤산)에 진을 치고 대완구를 비롯 무기를 갖추고 진을 쳤교 박정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섬진강을 건너 하동읍 만지등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부는 섬진강에서 큰 짚 등을 만들어 그 뒤에 숨어 강 모래사장으로 하여 하동읍 해량동까지 내려 왔다. 

만지등 일대의 동학농민군은 하동 접주 여장협이 인솔하는 1천여 명의 동도와 합세하여 민포단과 관군이 포진하고 있는 안봉으로 향해 갔으며 이때 안봉의 관군측에서는 대완구를 쏠 수 있는 관군이 없었다. 관군이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 한 청년 민병이 자기가 대완구를 쏠 수 있다고 하며 막대기 끝에다 기름을 붇혀 대완구 구명에 넣고 불을 붙이자 대포알이 섬진강 강물에 힘없이 나가 떨어졌다. 이것을 본 동학농민군은 관군이 소유하고 있는 대완구는 그 위력이 약하고 또 관리자가 없어 쓸모가 없게된 것을 알고 9월 4일에 총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날 치열한 전투 끝에 민포군 대장 김진옥, 진사 김영수, 수리 정찬두 그리고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를 했고 다음날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전좌수 강윤수도 전사하고 말았으며 수많은 민포단과 관군이 전사를 하였다. 안봉에 있던 민포군과 관군이 거의 전멸되자 5일 오후 6시경에 하동읍이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읍내로 들어온 동학농민군은 관가와 민가에 방화하여 700호 이상이 불에 타 전 읍내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하동읍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승승장구하여 민포의 발생지인 화계에 진격하여 탑리로부터 법하리 일대의 가옥을 모조리 불사르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이어서 악양과 적량에 들어가 민포군의 집을 낱낱히 찾아내어 불을 지르고 재산을 빼앗고 가족을 학살한 다음 용기 백배하여 진주성으로 진격해 갔다.

한편 진주에서는 9월 재봉기가 있었을 때 호남, 호서 지방과 동시에 봉기 했던 것으로 보아진다. 동학농민군의 통문에 의하면 "우리 진주민들은 모두 이산된 지경에 놓여 있으나 특별히 구제할 방도가 없으니 어떻게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달 초 8일 오전에 각리마다 13명씩 일제히 평거 광탄진으로 모여 이러한 상황을 완전히 의논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일종의 동원령 같은 것이다. 하동에 1천여 명의 동학교도가 모였을 것이고 동학 세력이 상당히 컸던 하동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이 진주 동학농민군과 합하여져서 그 세력으로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때 성주와 하동이 동학농민군에게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진주 병사는 부하와 더불어 천히 동학농민군을 맞아 주었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은 무혈로 진주에 입성하여 군정을 살피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은 9월 10일에 재차 통문을 각리, 동에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착하는 즉시 각리 각동의 리임과 동수들은 이 사통을 뜯어보고 민폐를 교정하기 바란다. 그리고 대동에서는 50명, 중동에서는 30명, 소동에서는 20명, 더 작은 동에서는 10명씩으로 내일 오전에 다시 일어나 대치(하동군 금남면 금오산 아래)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나오지 아니하거나 지체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그 동의 리임이나 동수의 집을 탕진하고 그 기세를 몰아 그 다음의 동까지 화가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미리 통지하는 것이니 만일 어떠한 경우에 처할지라도 이 통문만은 한마을에서 본 즉시 다른 마을로 전달하기 바랍니다. 아! 우리 백성들이여! 어떻게 살아 갈 수 있을 것인가 이제 14~15년의 흉년을 거친 뒤 또 77일간의 대간을 만났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온갖 폐단이 발생하고 있으니 아! 우리 백성들이여 어찌 살아 갈수 있을 것인가.

 

이 통문은 영·호 대접주 김인배의 주력부대가 진주에 들어가 전라도의 집강소와 같이 민폐를 근절시키기 위해 지시를 내린 명령서 같은 것이다. 천도교사에 보면 진주병사는 완전히 동학농민군에게 그 권한을 넘겼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단 진주를 장악한 동학농민군은 인근 군, 현으로 혁명의 기세를 넓혀갔다,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에 오타니(小谷)라는 일본 어부가 10월 18일에 겪었던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 장성방이란 조선사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인원수는 약 2천 명 가량 되는데 두 패로 나누어 한패는 고성으로 향하고 또 한패는 통영을 습격할 목적으로 이미 도중에서 몇 곳을 습격하고 지금 막 이곳을 통과 한 것이라 하고 내일은 남해 방면으로 나갈 것인즉 될 수 있는 대로 남해에 들리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동학농민군이 경상남도 해안 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이를 격퇴시키기 위해 부산에 있던 일본군 남부 병참관은 수비대 1개 중대를 진주 쪽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10월 20일에 출병 준비를 마치고 인력 및 식량 공급에 관해서는 대구 감사에게 요청하였고 아마 22일에 출병하여 김해, 웅천, 창원, 철원, 함안, 진해, 고성, 사천, 곤양의 노순으로 진주까지 온 것 같다.

1만여 명에 달하는 전라도 동학농민군을 오랫동안 주둔 시키려면 많은 식량과 숙소의 문제 등으로 민폐가 있기 때문에 각 군을 어느 정도 장악한 다음 경상도 동학농민군에 맡기고 10월 20일에서 30일 사이에 일단 후퇴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군 지원부대에 의해서 진주성을 되찾은 관군과 유생들은 일본군이 계속 주둔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고 또한 전라도 지방의 동학당을 진무키 위해 인천으로부터 출동한 우리 군대의 성과를 보기까지 퇴진하지 말아달라고 관군은 일본 병참사령에게 애원까지 했다. 그래서 진주 및 경남 해안 지역의 동학농민군들은 막강한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일시 후퇴하게 되었다.

 

(2) 고승단산 전투

 

일시 후퇴했던 경상도 동학농민군들은 11월초에 접어들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11월 6일 동학농민군 일부는 금오산 아래 대치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진주 백곡에도 5~6백명이 집결하였다. 당시 경남 지역 동학교도들은 덕산에 설치한 본부의 지휘에 따라 진주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이렇게 행동하였다.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에 의하면 동학의 주모자는 덕산에서 나왔다고 한다. '영남 각지의 동비들은 모두 덕산에서 나온 자들인데 덕산은 진주의 서쪽에 있는 지리산 밑에 있으며, 그 괴수는 언제나 덕산에 있으면서 그 곳을 도굴로 삼았던 것이빈다'라고 적혀 있다.

진주에 주둔해 있던 나가이(泳木) 대위는 병참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11월 6일부터 금오산 공격을 개시하였다. 1개 중대 병력을 세 곳으로 나누어 공격을 했는데 주력부대는 안심(사천시 진교면 고용리)과 성평 쪽으로 공격하였다. 나가이 대위의 보고에 의해 재부산 영사는 다음과 같이 상부에 보고하였다. '지난 6일 곤양으로부터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안심촌 남쪽 금오산이라고 하는 곳에 또다시 적이 집합하는 것을 발견하였답니다. 그래서 우리 군대가 세 방향에서 공격, 소탕하여 적의 사망자 5명이 생기고, 28명을 생포했으며 약간의 유기품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산 부사원고 11월 2일자에는 '위 양부대의 지휘를 맡기기 위해 4중대장 나가이 대위로 하여금 부산을 출발하여 곤양군에 이르게 함, 나가이 대위는 4일 곤양에 달하였음, 7일 나가이 대위는 2개 소대를 이끌고 안심동의 남방 금오산으로 나아가 동학당 약400명이 모여 있는 것을 만나 1소대는 본도로부터 1소대는 산남으로부터 전진시켜 협공, 이를 쳐부수었다. 적의 사체 6인, 생금(생포) 27인, 무기 약간을 압수함, 후에 지방민의 말에 의하면 적의 사체는 70여 구가 산간에 모여 있었다고 함'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하동지역에서는 일본군과 동학농민군과의 사이에 많은 격전이 있었다.

그리고 여장협이 이끈 하동지역 동학농민군은 금오산 전투 후 단성으로 옮겼다. 한편 천도교 백년 약사에는 10월 5일(야으 11. 3.)에 '경상도 진주대접주 전희순은 기포하라는 통문을 받고 기력이 광대한 도인 김학주와 더불어 곤양 군기소에 이르러 군기감역 문 모에게 사유를 말하고 군기를 달라고 하자 문 모는 응하지 않았다. 

이에 전 대접주는 숯불이 가득한 화로를 들어 그의 앞에 던지고 뺨을 후려치면서 이르되 우리는 나라 일을 위하여 탐관오리를 제거하려고 혁명을 일으키는 것인데 네가 만약 이 나라의 백성이 되어 우리의 뜻을 순종치 않으며 너부터 당장에 처 죽이리라 하고 다시 상위에 있는 벼룻장을 집이 드니 문 모는 황급하여 군기고의 열쇠를 내어 주었다. 이에 군기고 문을 열고 두 사람이 한 짐 씩 지고 나왔다.' 고 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섬멸하기 위해 무자비한 소탕계획을 세웠다. 우선 각 읍의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려면 '먼저 진주의 동비를 제거해야 하며, 그리고 진주의 동비를 제거하려면 먼저 덕산의 동비와 삼장, 시천, 청암, 사월 및 사오리에 거주하고 있는 반인, 상인이 동비들과 함께 살고 있는 마을을 제거해야 한다'는 초토화 작전을 세웠다. 특히 동비5명 이상을 숨겨준 동의 동수는 처형하거나 귀양을 보내고 접주를 숨겨준 자는 즉시 죽이며, 10명 이상의 마을은 동학을 하고 아니한 것을 논하지 말고 그 집을 불태우며, 접주와 동학도는 모조리 죽여서 용서하지 않는다는 법을 만든 연휴에야 동학을 모조리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동학농민군들은 최후의 결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상도 동학 지도부는 진주를 총공격하기로 하고 11월초부터 행동에 돌입했던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진주 공격은 서쪽과 동쪽에서 협공하기로 하였다. 서쪽에서는 산청의 삼장과 시천과 단성, 시월에 집결해 있던 동학농민군이 하동군 옥종을 거쳐 진양군 수곡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동쪽에서는 집현산과 송촌에 집결해 있던 동학농민군이 움직였으며, 남서쪽에서는 금오산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금오산 동학농민군은 11월 6일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흩어졌으며, 동쪽 집현산에 집결해 있던 동학농민군은 10일 일본군의 하라다(原田) 중위의 공격을 받고 흩어졌다. 이들 동학농민군은 여기서 흩어져 북쪽으로 이동 단성에 재집결하였다. 그리하여 옥종 쪽의 동학농민군 부대와 합류하였다.

진주 동학 지도부는 단성에서 단성현감 장직근의 협조를 받아 진을 치고 있던 중 일본군이 온다는 정보를 듣고 지세의 불리함을 생각하여 수곡으로 이동하여 건너편 고승당산으로 옮겼다. 고승당산은 천혜의 요새이다, 여기에는 자연으로 된 석루가 있는데 동학농민군은 그 석루를 더 축성하여 일본군에 대비하였다. 

이때 진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 4중대장 나가이 대위는 단성의 동학농민군이 수곡으로 옮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3개소대로 편성된 휘하 1개중대의 병력을 이끌고 수곡으로 진격해 갔다. 11월 11일 오전 8시에 고승당산에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과의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옥종면 대곡리와 북방리에 걸쳐 있는 186m의 야산인 고승당산 전투이다.

이 전투에 남해에서도 접주 정용태가 수천의 도인을 이끌고 참여했으며, 사천지역에서는 동학농민군이 선진리성에 있는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를 가지고 고승당산전투에 사용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이 진격한다는 급보를 받고 11월 11일 새벽 4시에 진주를 출발 30리 거리에 있는 수곡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적천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은 대치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고승당산과 동쪽의 넓은 뜰에 두 부대로 나누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일본군은 새벽에 원외리 쪽에서 도강 공격을 해 왔다.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을 보면, "11월 오전 4시 진주를 출발하여 서쪽 30리 남짓한 곳에 있는 수곡촌에 모여있는 동학당을 공격하려고 그 마을을 갔더니, 동학당이 산과 들에 가득 찼고 인원은 대략 1천4~5백 명이 있었다.(그 지방사람의 말로는 4~5천 명이라고 함) 8시 5분 그들이 사격해 옴으로 응전하였다. 점차 공진하여 가는데 그들의 절반은 산 북쪽으로 퇴거했다.

그래서 먼저 산 위에 있는 적을 공격하였으나 산꼭대기 누벽에 의지해서 완강하게 방어했으며, 또 북쪽으로 퇴거하였던 적도 다시 나와 우리의 우측을 습격하였다. 10시 15분에 1개 소대를 가지고 산 위의 성벽으로 돌입하여 이를 빼앗았다. 이때 우리 부상자는 3명이었다.

다른 1개 소대를 인솔, 좌측으로부터 적을 구축하고 그 곳에 있는 적을 격파하여 드디어 적의 배후에 이르러 적군을 격멸 소탕케 하였고 오전 11시 대오를 수습하였다. 적은 서북쪽 덕산을 향하여 패퇴하였다. 계속 이를 추적했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1개 중대의 신식 무기의 위력을 당하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곳의 전투는 관군이 포함되지 않고 일본군과 동학농민군만이 전투를 하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고, 단성현감이 동학농민군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등 편의를 제공했다는데도 큰 뜻이 있다고 본다.

이 전투에 투입된 일본군은 1개 중대로서 120명 이상이고, 무력 면에서는 일본군에 비해 너무 열세에 놓여 적수가 되지 못했다. 고승당산과 그 앞뜰에 배치된 동학농민군은 하동에서 노획한 대포와 200점 이상의 조총으로 무장하였다. 그러나 이 대포는 앞서 하동관군의 포격에서 보았듯이 조준율도 엉망이고 위력도 없는 쇠붙이에 불과 하였다. 그리고 총기도 옛날식 화승총으로 총신의 길이는 1미터 내외로서 화약을 총구로부터 장정하고 심지에 붙어 있는 불씨로 발사하게 되어 있어 1분간에 숙달된 사람이라도 3발 정도 밖에 발사할 수 없다. 특히 동학농민군이 갖고 있는 화승총은 구식이어서 사정거리 50m도 못 미치며 명중률도 10m 안쪽일 때 제대로 맞을 수 있다.

일본군은 열발 사격장치와 명중도가 높은 신식총으로 그것도 잘 훈련된 군대에 의해 사격하게 되므로 동학농민군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일본 기록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186명이 전사하고 단 2명만 생포하였다 한다. 그리고 화약 30관, 금전 6관 7백 90푼, 말 17필, 소 2두, 쌀 5두, 그리고 총 136정, 칼 18자루, 나팔 3개, 기 3기, 화살 2다발, 탄환 약5관, 창 54자루를 노획했다. 한다, 동학농민군은 진주 총공격을 시도하다 일본군 1개중대의 신식무기를 당하지 못하여 패퇴하였다.

이 전투에는 진주접은 손은석, 단성접주 임말룡, 마동접주 박재화, 김창규, 백주헌, 남해접주 정용태, 사천접주 윤치수, 하동접주 여장협이 참가하였다. 전사자는 일본군의 발표보다 배나 많은 4백명을 넘었고 접주의 전사도 많았다. 마동접주 백재화, 김창규, 백주헌, 하동접주 여장협 등은 이곳에서 전사했고 우정진 접주는 청암에서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사형 당했다.

진주접주 손은석, 사천 접주 윤치수는 살아 남아 후일 활동하였다고 한다. 곤명군의 마곡리 강제국과 작팔리의 박소금은 고승당산 전투에서 전사했고 신흥리의 여취익은 중상을 입고 시체더미 속에 묻혀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생환하여 불구로 여생을 보냈으며 역사 김덕영은 선봉역을 맡고 활약하다가 관헌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

고승당산 전투 후 하동으로 이동했던 나가이 대위의 일본군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순천 방면의 동학농민군과 다소 접전이 있었으나 이 마저도 뜸해져 11월 21일에 하동을 출발하여 11월 27일에 부산으로 돌아가고 진주와 하동에는 관군을 각 100명씩 두어 수비케 하였다.

이리하여 진주, 하동지역은 평온을 다시 되찾았으나 '영남지방에는 동학농민군의 소요가 아직도 종식되지 않았다'하여 조정에서는 12월 4일에 하동부사 홍택순을 조방장으로 내려보내 진압을 전의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