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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조선시대

충무공 이순신의 순국

내용
충무공 이순신의 순국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충무공 이순신의 순국

 

이순신과 진린은 진격하면서 포를 합쳐서 쏘니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하여 관음포 내항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이 선두로 적을 추격하니 해남현감 유형, 당진포 만호 조효열, 진도군수 선의경, 사량만호 김성옥의 배들도 이순신 함대의 뒤를 따랐다. 여러 배에서 현자포, 승자포, 지자포로 일시에 집중 사격하매 적 함대는 포구안으로 후퇴하여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곧 육지를 통하여 탈출하기에 이르렀다.

해남현감 유형은 무예가 뛰어난 장수로서 화살을 다하면 창으로, 창이 부러지면 쌍검으로 군사들의 진격로를 헤쳤는데 적의 조총에 맞아 쓰러졌다가 북소리를 듣고 다시 일어나 칼을 들고 다시 진격하므로 여러 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군관 송희립은 이순신과 같은 함선에 있으면서 독전하다가 적탄으로 왼쪽 이마 옆을 맞아 갑판 위에 기절하게 되었는데 어떤 타수 한명이 이것을 보고 "송군관이 총에 맞았다."하고 큰 소리로 외치니, 이순신이 깜짝 놀라 상반신을 높이 들어 송희립을 찾아보려는 순간 적탄 한발이 이순신 왼쪽 가슴을 깊이 뚫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크게 당황하여 이순신을 부축하여 들여놓았는데 임종하기에 앞서 이순시은 옆에 있던 병사들에게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고(戰方急愼勿言我死) 군사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군사들은 너무나 비통하여 "사도, 사도, 정신 차리시오, 사도." 할 때 기절했던 송희립이 정신이 들어 일어나 본 즉, 피가 흘러 얼굴과 옷에 물들었으므로 옷 속천을 찢어서 동여매고 급히 장대에 올라가 보니 이순신은 이미 숨을 거두었고 원수기만 펄럭이고 있었다.

송희립은 이순신의 아들 회와 조카 완이 곡하려 하므로 곡소리가 나지 않도록 그들의 입을 막고 고인의 갑옷과 투구를 벗겨서 홍단으로 시체를 싸게 하였다. 그 위에 갑옷과 투구를 다시 씌우고 방비로써 시체를 가린 뒤에 상을 발표하지 않은 채 계속하여 북을 치면서 싸움을 재촉하였다.

시마즈 야스히로가 이끄는 일본 함대는 일부 함대를 돌려 퇴각하였으나 퇴각치 못한 배와 군사 약 5백여 명은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목숨을 겨우 유지하여 헤엄쳐 남해에 상륙하여 육로를 따라 남해 왜성지가 있었던 선소리에 다다랐다.

패잔병들은 소 요시토시 군이 버리고 간 텅 빈 왜성 안에 들어가 잠복하고 있다가 11월 21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원해 준 함선에 의해 선소리를 떠나 일본군 집결지로 가서 합류하여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11월 19일 관음포구에서 일본군이 퇴각한 뒤, 일본군이 버리고 간 배들을 조·명 연합 함대는 모두 불태우고 포구를 봉쇄하였다. 이리하여 정오까지 적함대는 거의 불타 버렸으며 모두 깨어지고 암반에 올라앉았을 뿐 아니라 도망치지 못한 배와 군사는 거의 없어진 형편이 되었고 나머지 50여척의 일본전선은 결사적으로 저항하면서 겨우 탈출하였다.

전투는 정오경에 화력과 군선 면에서 우세한 전력을 갖춘 조·명연합 함대의 승리로 끝났다. 전토가 한창일 때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틈을 타고 묘도 서쪽 수로를 통과하여 남해도의 동쪽을 돌아 부산 쪽으로 퇴각했다.

노량해전 결과를 좌의정 이덕형이 현지를 돌아보고 올린 보고서의 의하면 "일본 군서 2백여 척을 격침시켰고 사상자는 수천 명"이라 하였으며, 명나라 군문에서 우리 조정에 통보한 전과로는  "일본군선 1백여 척을 포획하고 2백여 척을 분멸하였으며 5백여 급을 참수했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것이었다."

이순신 휘하의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야현감 고득장 등 장수급만 해도 10여명이 전사한 반면 진린 휘하에서는 부총병 등자룡, 부장 진잠의, 중군 도명재가 전사하였다.  당시 5백여 척의 일본전선을 맞아 80여 척으로 수적 열세를 보인 조선 수군에게는 3백여척에 달하는 명함대의 역할이 외적으로는 상당히 컸다고 분석할 수 있다. 

 

李恒福(병조판서, 1556~1618) 白沙集 卷4, 碑銘 '統制使李公露梁碑銘'

···적들이 이에 개미처럼 궤산되어 목숨만 살아남기에도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전고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장성이 빛을 감추더니 공이 마침내 동틀 무렵에 적탄을 맞아 넘어지고 말았다. 이때 공은 오히려 군중에게 경계하여 자신의 죽음을 말하지 못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꺾일까 염려된다."고 하였다. 이때 제독은 그 소식을 듣고 자기 몸을 세 번이나 배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함께 일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였고, 천병들 또한 고기를 물리치고 먹지 않았다.···

 

李芬(이순신 조카, 1565~1628) 行錄, 李忠武公全書 卷9.

전투가 끝난 뒤에 도독이 급히 배를 저어 가까이 와서 "통제사! 속히 나오시오, 속히 나오시오."하고 외친다. 완이 뱃머리에 서서 울면서 "숙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하였다. 도독은 배 위에 넘어지기를 세 번!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죽은 뒤에도 나를 구원해 주셨소."하고 다시금 가슴을 치며 한참이나 울었고 돋독의 군사들까지도 모두 다 고기를 내어 던지고 먹지 않았다.

 

安邦俊(의병장, 1573~1654) 隱鋒全書 卷7 露梁記事.

드디어 공의 죽음을 알리자, 각 배에서 모두 통곡하였다. 도독도 곡을 하면서 "천조에 돌아가서 마땅히 공의 충용을 천자께 고하려고 하였는데, 이제 이렇게 되었으니 애석하도다!"라고 하였다. 왜교에 있던 적의 진영은 동쪽의 왜적을 기다려 합세하여 싸우려고 했다가 재빨리 모두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柳成龍(임진왜란시 영의정, 1542~1607) 懲悲錄 卷2.

달아나는 적을 추격해서 남해 지경애 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순신은 이 싸움에서 친히 시석을 무릅쓰고 힘써 싸우다가 날온 적탄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가 황급히 그를 부축해서 장중으로 들어갔다. 이때 이순신은 가만히 입을 열어 "지금은 싸움이 심히 급한 때이니 아예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말라."하고 한마디를 남긴 채 애석하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순신의 조카 이완(李莞)은 본래 담략과 국량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순신의 말대로 그의 죽음 소식을 발표하지 않고 이순신의 명령으로 덩ㄱ 싸움을 독려했으므로 군중에서도 그의 죽음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이완은 배를 몰아 헤쳐 들어가 구원했다. 진린은 이순신이 자기를 구원한 줄로만 알고 사람을 보내어 사례하다가 비로소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 앉았다가 몸을 땅에 던지면서, "나는 통제사가 와서 구원해 주었거니 여겼는데 세상을 떠났다니 이게 웬 말인가?"하고 큰 소리로 통곡하니 군중이 모두 소리를 내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바닷속에 곡성이 진동했다.  행장은 우리 수군이 적병을 쫓아 그의 병영을 지나간 틈을 이용하여 뒤로 빠져 달아났다.···

 

趙慶男(임진왜란시 의병장, 1569~1641) 亂中雜錄3.

이때에 그의 아들 이회가 배에 있다가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북을 울리며 기를 휘둘렸다. 낮도 되지 않아서 적의 배는 거의 다 되고 물에 뛰어들어 죽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도망하여 벗어난 자는 겨우 50여 척이었다. 아군은 수급을 거두어 진린에게 다 바쳤다.(우리 배는 함평의 전함이 적에게 불탔다.) 한참 싸움이 무르익었을 때에 행장 등이 철병하여 몰래 묘도의 서량을 따라 나가 평산으로 향하여 바다로 달아났다.···

 

申欽(인조 때 영의정, 1566~1628) 象村集 卷56.

다음달 이순신이 적탄에 맞아 죽었다. 휘하 군사들이 그의 죽음을 숨겨 발상하지 않은 채 각적을 불며 깃발을 눕힌 뒤 더욱 힘껏 전투를 독려하여 적선 2백여 척을 쫓아 불태우자 적이 혹 도망쳐 남해로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노량진 쪽으로 달아나기도 하였따. 도독이 멀리 배 위에서 통제선의 사졸들이 수급과 왜화를 다투어 갖는 광경을 보고는 말하기를 "동제사가 필시 죽었을 것이다." 하였는데, 물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행장은 미조항의 외양을 통해서 일본으로 도망쳐갔는데, 행장을 잡아 목을 베지 못한 것은 그를 유제독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申炅(상촌 신흠의 손자, 1613~1653) 再造辯邦志5(상촌집 중 정왜지를 중심으로 저술)

한창 싸울 때에 순신이 순수 북을 치는데 홀연히 나는 탄환이 그의 가슴에 맞아 등 뒤로 나가 넘어지니 좌우에서 장막 속으로 붙들어 들였다. 숨이 끊어질 적에 부하 장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고 군사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지 말라." 하고 망르 마치자 죽었다. 순신의 조카 완이 본디 담량(담력과 재량)이 있어 그 죽은 것을 비밀로 하고 순신의 명령대로 더욱 급히 싸움을 동독하니 군중이 알지 못하였다. 적이 남해로 도망하여 들어가고 혹은 노량진으로 달아났다. 유형 또한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넘어진더니 조금 있다가 깨어나서 비로소 통제사의 죽음을 알고 통곡하면서 싸움을 동독하기에 더욱 힘썼다.

 

宣組修正實錄 卷32 戊戌 11月 壬午

유정이 순천의 적영을 다시 공격하고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그들의 구원병을 크게 패퇴시켰는데, 순신은 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때에 행장이 순천 왜교에다 성을 쌓고 굳게 지키면서 물러가지 않자 유정이 다시 진공하고, 순신은 진린과 해구를 막고 압박하였다. 행장이 사천의 적 심안돈오에게 후원을 요청하니 돈오가 바닷길로 와서 구원하므로 순신이 진격하여 대파하였는데, 적선 2백여척을 불태웠고 죽이고 노획한 것이 무수하였다. 남해 경계까지 추격해 순신이 몸소 시석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날아온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가 부축하여 장막으로 들어가니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하고 말을 마치자 절명하였다. 순신의 조카인 완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완은 그의 군사를 지휘해 구원하니, 적이 흩어져갔다. 진린이 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원해 준 것을 사례하다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는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였고,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들이 순신의 죽음을 듣고는 병영마다 통곡하였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을 마루리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순국하였다. 이순신의 호국정신은 혼신일체로 오로지 보국안민에 있었다. 일생의 신조가 오로지 나라와 정의를 위해서 다방면으로 연구하고 실천한 영웅이었다.

이순신은 항상 먼저 백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즉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적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 중에도 일본 함대가 육지에 가까이 있을 때는 일본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해서 무찔렀다. 그리고 피난을 다니는 백성들을 수용하여 안전한 생업을 보장해 주었기에 이순신 주위에는 항상 백성들이 따라 다녔다.

그리고 언제 적군이 침략해 와서 적과 대전할지 모르기 때문에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장수는 태만하지 않고 병사의 훈련은 물론 병기를 수리하고 관리하는 일에 소홀함히 없었다. 또한 정신력을 강화시켜 전투할 때 병사들이 위험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도록 했다. 전투 때는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둘러서 자신감을 갖도록 했다. 행사관이 곧 정신력이라는 것을 고취시킨 것이다.

이러한 정신 무장과 한 척의 적선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로 결전에 임했을때 후퇴함이 없이 적과 승부가 날 때까지 싸웠기에 승리를 한 것이다.

이순신은 철저히 정신 무장된 수군을 지휘하면서 노량해협 관음포의 지형, 지물, 시각, 기후, 조류, 항로 등을 잘 이용하여 화공전술과 당파전술로 노량해전을 승첩하게 된 것이다.  화공전술은 겨울철 계절풍인 북서풍을 이용하여 적선에 불붙은 나무를 마구 던져 적의 배를 연소시키니 적이 견디지 못하고 관음포 항구로 퇴각하게 되었다. 당파전술은 관음포와 앞바다에 거의 천 여척의 전선이 뒤엉켜 전투를 하는데 판옥선은 적의 안택선보다 견고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서로 부딪쳐 적선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지형지물은 물론 조류의 흐름과 시간을 잘 활용하여 전투시간을 조절하여 계획대로 진행하였다. 이순신은 지휘관으로서 군사를 통솔함에 있어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국가와 백성을 위해 싸우다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