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조선시대
남해읍성의 변천
상세내용
▶ 남해읍성의 변천
남해군은 왜구의 출몰로 인해 1357년 진주 임내 대야천부곡(현재의 하동군 북천면)으로 이전하였다가 조선의 건국 이후인 태종 4(1404) 구라량만호(仇羅梁萬戶)인 임덕수가 남해 현령을 겸임하면서 행정관서가 46년만에 다시 복구되었고 1406년 도감찰척출사를 지낸 최유정의 장계로 남해현성(현 고현성 또는 성산석성)을 축성하였다.
정이오(鄭以吾. 1347~1434)의 「남해읍성기」는 『교은문집』에 수록된 것을 『동구여지승람』을 발행하기 위해서 수집되었다. 현재의 군청 자리에 있는 읍성의 제원 아래 「정이오기」라는 형태로 정리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었으며 이를 지리지를 발행하면서 인용함으로써 마치 정이오의 「남해읍성기」가 현재의 남해읍성에 대한 기록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는 「남해읍성기」는 현재의 군청 자리에 있는 읍성과는 무관한 것으로 현재의 남해읍으로 이전하기 전에 존재했었던 읍성에 대한 기록이다. 정이오가 저술한 「남해읍성기」의 남해읍성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남해군 최초의 민보성으로 고려 정유년부터 46년이 지난 연후에 모신 지장들이 자체적으로 성을 쌓고 선함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고 하였다.
태종 4년(1404) 임덕수가 와서 보니 백성들에 의해 축성된 성이 좁아 최유경의 상소로 읍성을 축성하게 된다. 만호의 임기를 4년 기준으로 보면 1404년부터 1407년 사이에 읍성이 축성된 것이다.
남해읍성은 남해 백성의 힘만으로 축성한 것이 아니라 이웃고을 하동·사천·명진(현재의 반성)·고성·진해 등 다섯 고을 사람을 동원하여 고현 외딴섬 복판에 성을 쌓았다. 이 최초의 읍성은 민보성으로 축성되었고 읍성의 용도는 관아로 사용되었으며 문헌상으로 관당성이다. 성은 석축이며 둘레 720척 높이 9척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동국여지지』의ㅏ 「남해읍성」편에 나오는 태종 6년(1406)의 기록은 임덕수의 근무기간과 일치하며 「남해읍성기」에 기록된 성에 대한 내용으로 추정된다.
임덕수 현령이 축성한 읍성은 문헌에 나타난 화금현산성, 고현산성, 고현성, 성산성, 성산석성으로 명칭의 변화를 보이고 있는 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웃 고을 사람들의 책임구역을 나타내는 표식이 기단석에 음각되어 있다. 현재에도 하동의 흔적이 남아 있어 확인이 가능하다. 서 읍성의 제원은 문헌상에 나타나는 석축으로 둘레 1740척 높이 10척인 성이었다.
태종 14년(1414)의 행정개편에 따라 하동과 남해를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 칭하였고, 하동현이 독립됨에 따라 태종 15년(1415)에 다시 남해를 진주 임내의 금양부곡과 합하여 해양현(海陽縣)이라 불렀다. 그 후 금양이 진주에 병합됨에 따라 태종 17년(1417)에 독립되어 남해현이 되었다가 세종 1년(1419) 남해현은 곤명현(昆明縣)과 합쳐서 곤남군(昆南郡)이 되었다.
경상도 지리지 곤남군조를 살펴보면 세종 19년 남해를 복원하여 읍을 두었고, 세종 21년(1439) 화금현산성에서 죽산리로 읍성을 이전 축성하였는데 기존의 읍성이 비탈진 곳에 있어 옮겼다. 세종 21년(1439)에 읍성을 설치한 곳이 바로 군청이 위치한 곳이다. 읍성의 최초 제원은 문종 원년(1451) 「청경상충청각관성자척량계」라는 보고서를 정이오의 아들 충장공 정분이 성곽의 둘레 2,806척, 높이 12척, 해자 3,037척, 여장, 성문 3, 적대, 옹성 등을 상세히 보고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와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둘레가 2,876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세조 5년 성문을 하나 더 축성함으로써 70척이 늘어난 것이다. 임진란이 지나 영조 정축년(1757) 남해현령이었던 조세술이 무너진 곳을 다시 견고하게 쌓았다.
일제강점기 존재했었던 흔적을 조선전도를 통해 확인 가능하며 지적도에도 남아 있다. 그러나 죽산리 일대 언막이 공사와 봉내천 범람에 따라 헐어서 사용되었고 큰 기단석은 활용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남아 있거나 건물 아래 묻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성곽] 읍성 석축인데, 둘레는 2천 8백 76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 안에 우물 하나, 샘 하나가 있는데 사시로 마르지 않는다.
○ 정이오의 기문에, "남해현은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진도·거제와 함께 솥발차람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지역이 왜국과 아주 가까워서, 경인년부터 왜적에게 침략을 당하기 시작하여, 붙들려 가기도 하고, 이사하기도 하여 군의 속현인 평산 ·난포가 쓸쓸하게 사람이 없었다. 8년이 지난 정유년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진양 선천(鐥川)의 들판에 거처하였다. 그리하여 토지도 지키지 못하고, 공물과 부세도 바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판도(版圖)에 기재된 재물과 부세가 나오는 곳이, 모두 풀이 무성한 사슴의 놀이터로 되어 버렸고, 왜구들의 소굴이 된 지가 46년이었다. 그러나 계모가 있는 신하와 지략이 있는 장수의 빈틈없는 책략으로 선함을 수리하여 수전에 대비하고, 성과 해자를 설치하여서 수비를 엄하게 하니, 왜적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나날이 쇠하여졌다.
지금 임금이 즉위한 지 4년만에, 우수(雨岫) 임덕수(任德秀)를 등용하여 구라량 만호(仇羅梁萬戶)로 삼고, 겸하여 이 고을의 현령이 되게 하였다. 후가 와서는 계획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어서, 이로운 사업을 일으키고 민폐를 없애니, 군무(軍務)가 정비되고 민사 또한 거행되었다. 그러나 지역이 좁고 험하여서 백성들이 옛날에 살던 곳을 생각하였다. 후가 이 말을 듣고 민중과 협의한 다음,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최유경(崔有慶)공에게 사유를 갖추어서 조정에 알리도록 청하였다. 그리고 이웃 고을, 하동·사천·명주(溟州)·고성(固城)·진해 등 다섯 고을 사람을 동원하여, 고현 외딴 섬 북판에 성을 쌓았는데, 돌로 포개어 견고하게 하고 해자를 파서 못을 만들었다. 2월애 일을 시작해서 3월에 준공하였다. 남해 백성들이 죄다 돌아와서 그 밭을 갈고 그 집을 꾸며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며 즐기고 화락하였다. 물고기·소금·벼·따위 이익이 장차 지난 날의 부유함을 회복하리니, 이에 가문이 없을 수 없다. 후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청하였다.
내 생각하니, 왕(王)이나 공(公)이 요해지를 방비하여, 그 나라를 지키는 것은 『주역』의 가르침이요, 이 성을 쌓고 이 못을 파서 죽기를 기약하고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맹자』의 격언이다. 그러므로 주(周) 나라가 북방에 성을 쌓으니, 험윤(玁狁)의 난(難)이 없어지고, 정(鄭) 나라에서 호뇌(虎牢)에 성을 쌓으니 초인(楚人)으로 인한 걱정이 없어졌으며, 우리나라에도 바닷가 고을에 성을 쌓으니 왜구의 침해가 그치게 되었다. 대게 성보(城堡)로 지키면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제어할 수 있고,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대적할 수 있으며, 편한 것으로써 수고하는 것을 대적할 수 있게 된다. 하물며 이 고을은 남방의 훌륭한 지역으로서, 해산물의 풍족함과 토산물의 풍부함이 나라 쓰임에 꼭 필요한 것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리고 진도의 거제를 부흥하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지금 바다에는 쓸만한 수군이 있고, 성곽에는 지킬 수 있는 누(樓)와 순(楯)이 있으며, 주야로 조심하는 봉수(烽燧)가 있으니, 흉악한 적을 방어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구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딴 섬, 외로운 성에 외방의 구원이 없다 하여, 베개를 높이 베고 편하게 눕지 못한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나는 장차 돛대를 두드리며 남해 터를 죄다 찾아다니고, 성루의 난간 위에서 술을 들며 국가에서 인재를 얻었음을 경하하리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