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조선시대
지방제도
상세내용
▶ 남해현의 잦은 지명 변경
남해현은 공민왕 7년(1358) 진주 임내 대야천부곡으로 관아를 이전한지 46년만인 태종 4년(1404) 임덕수를 구라량 만호와 겸하여 남해현령으로 삼으면서 복구되었다. 태종 13년(1413) 전국을 8도로 난고 경상도의 감영을 상주에 두었다. 이때 진주는 20개 목 중의 하나였다.
1414년 군현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동현과 합하여 하남현으로 개칭되었다. 이듬해 하동현이 독립하면서 남해현과 진주임내 금양부곡을 합하여 해양현이라 했다. 1417년 금양부곡이 진주에 다시 합병되어 남해현으로 독립되었다. 세종 1년(1419) 진주에 속해 있던 곤명(昆明)을 남해현에 병합시켜 곤남군(昆南郡)으로 삼았지만 세종 19년(1437) 다시 남해현으로 독립했다.
조선시대 초기의 잦은 지명변천에 대한 자료는 『조선왕조실록』과 문종 2년(1452)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정조 10년(1786)에 편찬된 『진주진관지(晋州鎭管誌)』, 정조 9년(1785)과 순조 32년(1832)에 편찬된 『남해현읍지』, 1937년 간행된 『조선환여승람(朝鮮環與勝覽)』등에 거의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중 마지막으로 간행된 지리서인 『조선황여승람』의 기록이 이전에 편찬된 사료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건치연혁(建置沿革)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어 인용해 보겠다.
● 남해군
동쪽으로 5리, 서쪽으로 10리, 남쪽으로 40리 해안에 있고, 북쪽으로 38리에 노량진이 있다. 건치연혁 : 본래 바다 가운데 섬으로 신라 신문왕 때 처음으로 전야산군이 설치되었다.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때 현령을 두었다. 공민왕 때에 왜구로 인해 땅을 잃고 진주 선천부곡에 임시로 거처하였다. 조선 태종 때 하동을 합하여 하남현이라 칭했다. 후에 하동현이 복현됨으로써 진주 금양부곡을 내속시켜 해양현이라 불렀다. 얼마후 금양을 진주에 환속시킴으로써 다시 남해라 칭했다. 곤명(일명 곤양현)을 합쳤다가 19년 다시 갈라 현으로 삼았다. 연산군 4년에 남해현인이 구례민 배목인과 함께 보만했기에 현감으로 강등시켰다가 중종 2년에 다시 현령을 두었다. 고종 32년 예규를 두어 군으로 군수를 배치했으며, 광무10년(1906) 진주의 흥선현을 내속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환여승람』의 건치연혁에는 곤명현을 합쳤을 때의 연유와 명칭이 나와 있지 않지만 『세종실록』 원년 3월 27일조에 병합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태종28권, 14년(1414 갑오년) 8월 21일(신유) 4번째 기사 하동현과 남해현을 병합하여 하남현으로 부르다
<전략>임금이 말하였다. "이제 적국(敵國)의 외환이 없으니, 갑사(甲士)의 수가 비록 적더라도 가하다. <중략> 내가 또 경외(京外)의 용관
(冗官)을 도태시켜서 늠록(凜祿)을 감하고자 하니, 경등이 상량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에 자문(紫門)에 모여서 정부에서 상량 의논하여 아뢰었다.
"삼군(三軍) 동지총제 각각 1명, 공안부윤·인녕부윤·한성부윤 각각 1명을 없애고, ···중략···
하동·남해를 병합하여 하남(河南)으로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또 명하여 검교(檢校)가 녹(祿)을 받는 것은 의정부 좌참찬에서 공조참의에 이르기까지 10명으로 수를 정하고, 환관 검교(宦官檢校)20명, 상의원(尙衣院) 사직(司直) 2명을 없애고, 각도 도절제사도·수군 도절제사도에 수령관을 업애고 삼군 녹사(三軍錄事)로 차임(差任)하였다.
○ 태종 29권, 15년(1415 을미년) 3월 25일(계해) 2번째 기사 하동은 복구하고 남해 등 8개읍은 다시 세우다
<전략>서흥(瑞興)·재령(載寧) 2개 현(縣)은 1천 호(戶) 이상으로 이를 승격시켜 군(郡)으로 삼았다. 처음에 하교하기를.
"각 고을(官)을 병합한 것을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니, 중전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병조판소 김승주(金承霔)가, "마땅히 병합할 것은 합하여 군자(軍資)에 보충함이 가합니다. 비록 소민(小民)이 원망한다 하더라도 가볍게 고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승정원과 육조에 명하여 갑오년에 병합한 18개 군의 편부(便否)를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하동(河東)·거창(居昌)·부령(扶零)·이성(泥城)·풍천(豊川)·덕천(德川)·자산(慈山) 7개 읍(邑)은 옛 이름을 복구하고, 거제(巨濟)·남해(南海)·석성(石城)·보안(保安)·은률(殷栗)·맹산(孟山)·박천(博川)·은산(殷山) 8개 읍은 다시 세웠다. <하략>
○ 세종 3권, 1년(1419 기해년) 3월 27일(신미) 5번째 기사 진주 곤명을 남해현에 합하여 곤남군으로 승격시키다
진주에 소속되었던 곤명현(昆明縣)을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승격시켜 곤남군(昆南郡)을 만들었다. 처음에 왕의 태(胎)를 곤명 땅에 매안(埋安)하여, 곤명 사람들이 따로 고을을 설치하자는 주청이 있으므로, 경상도 감사에게 명하여 가부를 살펴서 알리라고 했던 것인데, 요새와서 감사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곤명을 남해현과 합하여 따로 한 고을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고, 아울러 지도를 오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형으로 보면, 곤명이 당연히 남해와 합해야 하겠으나, 곤명을 빼앗아서 남해에게 주면, 진주 사람이 반드시 원통하다 할 것이니 어떻게 하느냐,"고 하니, 호조 판서 권진(權軫)·공조 판서 이적(李迹) 등이 아뢰기를, "진주는 일찍이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진되었는데 목(牧)으로 내려졌으니, 지금 어태(御胎)를 매안한 연고로써 다시 그전대로 올려 주는 것이 편의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원숙·김익정 등이 아뢰기를, "곤명이 진주 사람의 횡포에 시달리어 따로 고을을 만들려고 한 적이 오래였고, 또 진주는 토지도 넓고 인물도 많아서, 남방의 으뜸을 차지하고 있으니, 백 호쯤 되는 곤명이 떨어져 나간다 해도 별 영향이 없을 것이며, 하물며 지금 어태를 그 땅에 매안하지 아니하였습니까, 곤명은 남해에 합쳐, 따로 곤남군을 만드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줄 아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원숙 등의 제안에 따랐다.
○ 세종 77권, 19년(1437 정사년) 6월 23일(신사) 3번째 기사 남해도에 현을 설치하고 왜적을 방어하게 하다
병조에서 경상도 감사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남해도(南海島)는 토지가 기름지고 성이 튼튼하며 주민이 많은데, 관할(管轄)하는 곳이 없어서 대체에 어긋남이 있고, 또 곁에 가까운 고을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만일 왜적(倭賊)의 변이 있으면 미처 구원할 수 없ㅇ으니, 원컨대, 현을 설치하고 무략(武略)이 있는 자를 골라 임명하여 변경을 튼튼하게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 78권, 19년(1437 정사년) 7월 3일(신묘) 3번째 기사
남해현으로 복현, 수령을 두고 옛 지명을 회복하다
경상도 남해현(南海縣)을 곤명현(昆明縣)에 합쳐서 곤남군이라 일컬었고, 전라도 진도군(珍島郡)을 해남현(海南縣)에 합쳐서 해진군(海珍郡)이라 일컬었는데, 이때에 와서 둘로 나누어서 각각 수령을 두고 옛이름을 회복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중 곤남군
본디는 곤명현(昆明縣)이다. 신라 때의 이름은 자세히 알 수 없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진주 임내(任內)에 붙였는데, 본조(本朝) 금상(今上)이 즉위한 원년(元年) 기해에 어태(御胎)를 현에서 20리 북쪽 소곡산(所谷山)에 안치하고, 남해현(南海縣)을 곤명현에 합쳐서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시켰다. 남해현은 본디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인데, 신라 신문왕이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남해군으로 고쳤고, 현종 무오년에 현령관(縣令官)을 두었다.
공민왕이 무술년에 왜적으로 인하여 땅을 잃고, 진주 임내(任內)인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에 교거(僑居)하였는데, 본조 태종 갑오년에 하동과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으로 일컫다가, 을미년에 다시 하동현을 설치하고 진주 임내인 금양부곡(金陽部曲)을 남해에 붙여서 해양현(海陽縣)으로 일컬었으며, 정유년에 금양을 도로 진주로 붙이고 다시 남해현(南海縣)을 삼았다가, 기해년에 곤명현(昆明縣)에 합하였다.
난포현(蘭浦縣)은 본디 내포현(內浦縣)이고, 평산현(平山縣)은 본디 서평산(西平山)이다. 위의 두 현은 모두 바다 섬인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남해군의 영현(領縣)을 만들고, 고려에서 그대로 따랐는데, 왜적으로 인하여 인물(人物)이 모두 없어지고 다만 토지만이 있을 뿐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진주에 이르기 17리, 서쪽으로 하동에 이르기 6리, 남쪽으로 하동에 이르기 14리, 북쪽으로 진주에 이르기 9리이다.
호수는 2백 70 단(單) 1호, 인구가 1천 3백 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1명, 진군(鎭軍)이 9명, 선군(船軍)이 1백 36명이다.
곤명(昆明)의 성(姓)이 3이니, 유(兪)·전(全)·문(文)이요, 현(縣)을 세운 뒤의 성이 2이니, 현(玄)·백(白)이며, 내성(來姓)이 3이니, 강(康)·박(朴)이요, 촌락성이 1이니, 고(高)이며, 평산(平山)의 성이 3이니, 조(趙)·배(裵)·백(白)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조(曺)이다. 없어진 다음향(多音鄕)의 속성(續姓)이 1이니,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1천 8백 24결이다.(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벼·기장·콩·조·감·송이(松茸)·목면(木綿)·삼(麻)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표고버섯·문어·홍합·지초·칠·사슴가죽·삵가죽·노루가죽이며, 약재(藥材)는 천문동(天門冬)이요, 토산(土産)은 생포(生鮑)·미역·은구어·해삼이다. 염소(鹽所)가 3이니, 모두 군(郡) 남쪽에 있다.(염창(鹽倉)이 있고, 염장관(鹽場官)이 감독해 지킨다) 자기소(磁器所)가 2이니, 하나는 군(郡) 남쪽 포곡리(浦谷里)에 있고, (중품이다) 하나는 군(郡) 동쪽 노동(蘆洞)에 있다.(중품이다)
역(驛)이 1이니, 완사(完沙)이다. (본래는 남해도(南海島) 덕신역(德新驛)이었는데, 왜적으로 인하여 육지로 나왔다) 평산포(平山浦)는 남해도 남쪽에 있다. (본군(本郡)에서 90리 거리인데, 노량(露梁)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수어한다) 봉화가 3곳이니 금산(錦山)은 남해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본도(本道) 소흘산(所屹山)에 응한다. 소흘산(所屹山) 서쪽으로 망운산(望雲山)에 응한다) 망운산(望雲山)은 남해도 남쪽에 있다. (북쪽으로 진주(晉州) 금양 부곡(金陽部曲)의 양둔(陽芚)에 응한다) 남해도(南海島)는 수로(水路)로 1리 2백 48보이다.(백성들이 들어가 살면서 농사를 짓는다)
○ 연산 31권, 4년(1498 무오년) 10월 8일(경오) 2번째 기사 구례현과 남해현의 수령을 현감으로 강등하다
명하여, 배목인(裵目仁)이 살았던 구례현(求禮縣)을 혁파하는 것이 편의한가에 대하여 의논하게 하니, 윤필상·정문형·성준·강귀손이 의논드리기를, "목인이 비록 원적(原籍)은 구례 백성은 아니오나, 그 땅에서 난리를 선동하였으니 혁파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고을이 해적(海賊)의 직로(直路)가 되므로 국가에서 일찍이 성을 쌀 것을 의논했사오니, 목인의 애비 계종(係宗)이 남해(南海)에 살았으니 그 고을도 또한 혁파해야 하옵니다만, 만약 진(鎭)이 있는 곳이라서 혁파할 수 없다면 강등해서 현감(縣監)으로 만드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고,
한치형·이극균은 의논드리기를, "배계종 부자는 김해(金海)에서 출생하여 마적(馬賊)의 와주(窩主)로 남해에 정속(定屬)되었었는데, 계종의 아들 목인이 조금 지리(地理)를 알므로 드디어 불궤(不軌)의 마음을 품고 구례(求禮)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반역을 꾀하였으며 그 애비 계종은 남해에서 역모(逆謨)를 제창 하였으니, 이 두 고을은 모두 반역의 고을이라 혁파하는 것이 당연하오나 목인 부자가 본시 두고을 백성이 아니니, 역신(逆臣)의 출생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시애(李施愛)가 길주(吉州)에서 출생했으나 강호(降號)만 해서 현(縣)으로 만들었는데, 남해·구례는 모두가 현이라서 강호하기가 어렵습니다."하니, 필상 등의 논의를 좇았다.
○ 연산 31권, 4년(1498 무오년) 11월 2일(갑오) 1번째기사 배목인 일당을 처벌하고 사령을 반포하다
권정례(權停例)로 백관의 하례를 받고 중·외에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나는 덕이 적고 일에 어두운 자로서 큰 기업을 이어받아 숙야(夙夜)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깊은 못에 다다른양, 엷은 얼음을 밟는 양 몸둘 바를 모르는 듯하여 거의 신민의 추대하는 소망을 보호하고 조종(祖宗)의 어렵고 큰 업을 보전할 것을 다짐하였었다.
뜻밖에 구례현 백성 배목인이 화심(禍心)을 내포하고 거짓으로 비결을 만들어 우매한 백성들을 속이고 현혹시켜, 불궤(不軌)를 꾀하였고, 성한손(成漢孫)·문빈(文彬)등이 그 심복이 되어 음으로 도당을 결성하였고, 목인의 아비 계종(係宗)이 역모(逆謨)를 완수할 생각으로 남해(南海)의 불순한 무리들을 유인해 모아서, 부자가 난리를 선동하니 그 당여(黨與)가 얽히고 서린데다가 두 고을의 백성이 따라서 부화한 자도 무려 70여 명이었다. 죄가 크고 악이 극하여 흉한 모의가 저절로 무너져서 목인 등 37명은 율(律)에 의해 처형되었고 그 나머지도 죄의 경중에 따라 모두 먼 지방으로 내쳤다. 목인 부자가 살던 구례 고을을 혁파하고 남해는 강호(降號)했으며 목인·한손·문빈·계종 등의 부자와 이환(李還)의 아들도 아울러 교수형(絞首刑)에 연좌시켰으나, 그 나머지 율(律)에 연좌(緣坐)되어야 할 사람들은 차마 모두 따로 처치할 수 없어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나의 호생(好生)하는 마음을 보이노라.
금 11월 1일 새벽 이전까지의 모반(謨叛)과, 자손으로 조부모·부모를 모살(謨殺)·구매(毆罵)한 자와 처·첩이 지아비를 모살한 자와, 노비가 상전을 모살한 자와, 고의로 살인을 꾀하여 고독(蠱毒)과 염매(饜魅)를 한 자와, 강·절도를 범한 자와, 강상(綱常)에 관계된 자와, 국가 장오(臟汚)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건 아직 발간 안되었건, 이미 결정되었건, 아직 결정 안되었건, 모두 유제(宥際)하며, 이미 정배된 유(流)·도(徒) ·부처(付處)·충군(充軍)된 사람들도 아울러 석방하니, 감히 유지(宥旨)가 내린 이전의 일로써 서로 고하는 자는 그 죄를 죄줄 것이다.
아! 죄악이 누적되어 이미 부월(鈇鉞)의 주(誅)를 받았으니, 구하(垢瑕)를 탕척하여 마땅히 환한(渙汗)의 은택에 젖도록 하라."
고종 32년(1895) 5월 26일에 전문 6조로 된 칙령 제98호에 의거 태종 13년(1413) 이래 482년간 시행해 오던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구분하였다. 부 아래로는 종전의 부목군현(府牧郡縣)을 통틀어 군(郡)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하여 336군으로 편성하는 획기적인 지방제도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때 남해현의 지명도 남해군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때 설천면(雪千面)이 설천면(雪川面)으로 고쳐졌으며 남해군은 현내면, 이동면, 삼동면, 남면, 서면, 고현면, 설천면의 7면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지은 조선시대 야사총서(野史叢書)인 『연려실기술』지리전고 주와 군에 남해현이 7면으로 기록되어 있어 남해군으로 바뀌기 전인 1700년대에도 7면이었음을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