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조선시대
조선시대
상세내용
▶ 개관
14세기 말 고려는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한 권문세족과 이를 비판하는 신진 사대부들의 세력 다툼으로 정치가 혼란했으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원명교체기의 혼란 속에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반환을 요구하자 최영은 이에 맞서 요동을 정벌하기 위한 정벌군을 파견했다. 하지만 우군 도통사 이성계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평양에 있던 최영에게 4대 불가론을 내세워 회군을 청했다. 그러나 회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1388년 음력 5월 20일 군사를 수도로 돌려 쿠데타를 일으켰다.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최영 세력을 숙청하고 우왕을 폐위한 뒤 창왕을 왕위에 올렸다. 동시에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들과 손잡고 과전법을 마련하여 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을 무너뜨리는 등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듬해에는 창왕을 다시 폐하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
1392년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고 그해 음력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1393년 2월 15일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고 새 왕조를 설립하였다. '조선' 이란 옛 '고조선'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1394년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경북궁을 비롯한 궁궐, 종묘, 사직, 관아, 학교, 시장, 도로 등을 건설하여 도읍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유학을 국가의 기본으로 삼고 농본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500년의 근본정책이 되게하였고 농상 장려, 관세 정비 등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데 업적을 이룩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승리를 거둔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사병을 혁파했으며 왕실 외척과 공신 세력을 숙청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켜 정치를 안정시켰다. 뒤를 이은 세종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여러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주자학을 국가 이념으로 정착시켰다. 또한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국경을 확정시켰다. 그리고 집현전을 설치하여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금속활자를 개량하였다.
단종을 폐위하고 왕권을 찬탈한 세조는 이징옥과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성종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학을 장려하여 사라진 집현전의 기능을 담당한 홍문관을 설치하고, 세종 때부터 이어온 『경국대전』의 편찬을 완성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기본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였다.
성종대에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등용되었던 사림파는 갑자사화로 밀려났다가 중종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조광조를 중심으로 철저한 유교적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던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훈구 세력의 반발과 중종의 싫증을 불러일으켰고 기묘사화로 도학청지의 꿈은 끝나고 말았다.
1545년 명종이 등극하지만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소윤이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을 몰아내는 을사사화로 문정왕후의 극단정치가 시작되었다. 문정왕후는 조선이 유교 사회였음에도 승려 보우를 판선교 양종사도 대선사라는 정2품 직책에 앉히고 도첩제를 실시해 승려를 뽑는 제도를 만들어 비난을 받았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윤원형과 정경부인 정난정의 관직과 직위를 삭탈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2년 후 죽고 말았다.
1567년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이황, 이이 등 사람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기묘사화 때 당쟁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들을 복권시켰다. 그러나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충돌하면서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분리되었고 붕당을 형성하였다. 한편, 일본의 전국시대를 종결시킨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정벌을 위해서 길을 빌린다는 이유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왕권과 국방을 강화하였다. 또한 실리 외교를 펼쳐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서인과 남인은 연합하여 북인을 몰아내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옹립하였다. 인조가 명나라와의 친선정책을 펼치자 청나라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전쟁의 패배로 청나라와 치욕적인 군신 관계를 맺었지만 인조의 뒤를 이어 등극한 효종은 국방을 강화하면서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송시열과 이완 등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청나라에 복수하고자 했지만 1659년 효종의 서거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인과 서인의 대립은 예송논쟁을 통해 극에 달했다. 현종 원년(1659) 1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숙종 원년(1674) 2차 예송논쟁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권력을 주고 받았지만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득세하였다. 하지만 서인은 남인을 완전히 축출하고자 했던 노론과 온건파였던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정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은 1689년 희빈 장씨 소생 윤(昀)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기사환국으로 남인에 의해 대부분 희생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소론이 정권을 잡고 노론이 다시 재기하여 숙종 말기에서 영조 때까지 두 정파가 정국을 양분하였다. 그 후 정권을 주도하던 노론은 영조 38년(1762)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반대파인 벽파(僻派)로 나누어졌다. 영조 때에는 벽파가 정조 때에는 시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순조 즉위 후 신유사옥으로 벽파가 정권을 독식하였다.
이러한 당쟁 속에서도 영조는 당파 싸움을 종식시키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여 노론과 소론을 두루 기용하는 중도의 정치를 실천하였다. 할아버지 영조에게서 왕위를 계승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시파와 벽파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붕당정치를 척결하기위해 당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마저도 금지시켰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안동 김씨의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헌조 때는 풍양 조씨, 철종 때는 다시 안동 김씨가 득세하면서 왕권은 약화되고 기형적인 세도정치가 6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갔으며 홍경래의 나느 임술농민항쟁 등 농민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 이하응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세도정치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사액서원을 제외한 서원들을 대부분 철폐하여 유생들의 불만을 샀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북궁을 증건하고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 이하 각 관서 및 도성, 그리고 북한산성을 수축했지만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물가상승의 폐해를 맛보아야 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두 환란을 겪은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펼쳤지만 조선의 문호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1875년 운요호 사건으로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쇄국의 빗장은 풀리고 문호를 개방하였다. 개화벙책을 위해 통리기무아문을 두었고, 뒤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모두 치외 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취할 수 없게 규정된 불평등 조약이었다.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유생들은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신구세력의 갈등은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구한말의 혼란은 농촌경제를 파탄에 빠뜨렸고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際暴救民)을 내세워 삼남지방을 장악하고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중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경북궁을 점령한 일본은 갑오개혁을 강요하였다. 갑오개혁은 농민과 근대화 개혁의 요구를 담고 있었으나 일본의 조선침략에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현실에 부응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일본이 명성왕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연이어 겪으며 조선은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 왕을 황제라 일컬어 독립 국가로써 새 출발을 하려 했으나 외세에 의존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을사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아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한일합병조약을 통과시켰으며, 8월 29일 조약을 공포함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