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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고려시대

역참과 조창

내용
역참과 조창 및 봉수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역참과 조창

역참과 조창은 고려시대의 육로 및 수로의 운수를 담당한 대표적 교통기관으로 정치·경제·군사·문화·사회의 각 분야에 걸쳐 지극히 중요한 직분을 수행하였다. 역참제와 조창제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 수입한 것이었는데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이미 신라 때부터 실시되었고 그 시설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존손 발전하여 왔다.

 

(1) 역참

역참은 공문서의 전달 관리, 안내와 숙박, 관물의 수송, 정령 및 공부의 전달과 특수물자의 수송 등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적인 규모와 계통이 이루어질 만큼 발전되었다. 따라서 역참에는 역전, 역정, 역마가 구비되어 있었고 역은 교통량과 군사 및 경제의 중요성에 따라 대·중·소 3등급으로 구별되었고 각각 공수전(公須田 : 고려시대 관리들의 숙박·접대 등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분급하던 땅으로 이 제도는 성종 2년(893)에 시작되었음),  지전(紙田 : 지방관청의 소모품인 종이·먹·붓·기타잡비에 충당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 장전(長田 : 고려·조선시대 각 역장의 공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 공수시지(公須柴地 : 고려시대 전제로서 각 관청의 종이·먹·책·기름 등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분급된 공해전(公解田) 일종으로 각 부·군·현에 나누어 주었다), 관전(館田 : 고려시대부터 시행하던 객관에 대한 분급지로 각 지방에 관과 역에 전지를 주어 그 경비로 쓰게 하였다)등이 역의 구별에 따라 급여됨으로써 참역의 경비와 객관의 식료를 공급하게 했다.

정부의 각 기관에서 주부에 보내는 공문서는 먼저 상서성(尙書省)에 아려 이곳에서 가부를 결정한 다음 수역인 청교역(靑郊驛)에 보내 전국 각지에 전달하게 하였다. 공문서는 각기 용건의 완급에 따라 공문서를 넣는 피대에 방울을 달아 표시하였다. 즉 1급(一急 : 평상)에는 1령, 2급(二急 : 보통)에는 2령, 3급(三急 : 지급)에는 3령을 달았다.

역참은 전국에 걸쳐 525개가 있고 역로의 간선은 22도(道)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새로운 교통수단은 개발되지 못하고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육로를 이용하였고 그나마 말이 없는 사람은 도보에 의존하였다. 양반과 관료는 중앙 상서원(尙書院)이 발급하는 마패라든가, 지방의 감사·병사·수사가 발급하는 발마패(發馬牌)에 의하여 각 역에서 말을 얻어 탔다. 화물은 인력, 우마 이외에 관(官)에서 대차(大車 : 소 두 마리가 끄는 큰 수레), 사치, 곡차, 강주(扛輈 : 이인이 메는 귀중품용)등이 있었는데 그 전송과 중계는 역참에서 이루어 졌다.

주요도로에는 대략 30리 거리를 두고 공문서를 전달하는 이외에 공무 여행자에게 마필을 제공하고 그 숙식을 알선하기도 하며 진현상 관물의 수송까지도 담당했다.

역참에는 역장, 역리, 역졸을 두어 역정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수십 개의 역을 한 도(道)로 하여 지방에서 역을 지키는 외직인 종6품 찰방 또는 종9품 역승이 이를 관장하는 동시에 소요되는 중요 정보도 수집·보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외직딩던 종9품 도승은 전국의 중요도 선장을 맡고 있었는데 뒤에 별장으로 대치되었다.

역은 고려 때부터 정비되어 이 무렵에는 그 수가 540여 개에 이르렀다. 그리고 역과 역 중간에는 참(站)이란 건물이 있어서 공용으로 급히 여행가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고려시대에 비롯된 것인데 조선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여 각 도(道)에 참을 설치하고 아록전(衙碌田)을 지급하여 경비에 충당하였다. 선조 30년(1597) 군사상 필요가 증대하여 종래의 제도를 고쳐 파발을 두게 되었으며 또 변방의 보고를 중앙에 신속히 전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발참을 증설하였다.  파발은 다시 25리에 하나씩 설치된 기발과 30리에 하나씩 설치된 보발로 나누어 외교·군사상의 요지에 설치되었다.

또 여행자들을 위한 시설을 보면, 각 주, 현에 관(館) 및 원(院)이 있었고 그 경비를 위해 원위전(院位田) 등을 지급하여 부근의 주민이 경영·관리 일체를 맡았다. 공무를 띤 여행자는 대개 관아나 역에서 숙식을 제공 받았다. 일반 여행자는 주막을 이용하였다.

남해에는 설천면의 덕신역원이 소로(小路 : 小驛)이기는 하지만 고려 중기부터 이어 내려온 현내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역원이었다.  이 역원은 노량에서 들어 온 도로가 고현면 차면에 접속되는 부근에 있었던 것 같다. 대체로 조선 중엽에 이르러 남해는 덕신역을 비롯하여 노량원, 지족진원 등 세 개의 역원이 있었다. 노량원과 지족진원은 당시의 소도처(所渡處) 즉, 항구의 조창기점 구실을 겸하고 있는데 반하여 덕신역원은 육상 역원으로써 체제를 갖추고 북으로는 곤양, 양포역과 연결된 이 역은 역장 이하 역리가 22명 있었다.

조선새대에 들어 역을 중심으로 한 전국 도로망은 서울을 기점으로 의주간의 제1선, 경흥, 서수라까지의 제2선, 강릉, 평해까지의 제3선, 유곡, 동래, 부산까지의 제4선, 유곡, 고성, 통영까지의 제5선, 소사, 삼례역, 고성, 통영까지의 제6선, 서울, 소사, 삼례역, 해남, 관두량, 제주까지의 제7선, 소사, 중청, 수영까지의 제8선으로 뚫어져 있었는데 남해 덕신역은 제6선에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역승의 지휘 하에 있었으나 중종 30년(1535)에 찰발의 관장아래 있었다. 『진주진관』「남해현지」에 따르면 덕신원은 현의 북쪽 35리 지점에 있고 북으로 30리에 곤양, 양포역이 있다. 중마 5필이 있고 북마 4필이 있었으며, 역리는 22명 있었다. 노량원은 노량의 남쪽해안에 있고 현의 북쪽 40리 지점이다. 지족원은 현의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해현읍지』에 따르면 당시의 관액인 해운항으로 노량진은 현의 북쪽 37리에 있으며 곤양과 인접하여 경계를 이루고 진선 1척이 있다. 호을포진(瑚乙浦津)은 현의 서쪽 15리에 있으며, 전라도 순천과 인접하여 경계를 이룬다. 선소는 현의 동쪽 5리에 있고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3척이 배치되고 전선대장 1인과 감관 2인 아래 주사군(舟師軍) 150명이 있었다. 

 

▶ 조창

『진주진관지』에 조창이 현의 북쪽 37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세로 거둔 쌀의 수송을 위하여 수로 연변에 설치한 창고로 해상 수송을 맡은 조창을 해운창(海運倉), 강상 수송을 맡은 조창을 수운창(水運倉)이라 하였다.

조창의 제도가 완비된 것은 고려 성종 11년(922)으로 각 조창에서는 매년 2월부터 4~5월까지 세미를 수송케 하였으며, 횡령과 부정행위를 막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각 조창에 창감리(倉監理)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 왜구의 발호로 해상 수송이 불가능해져 육로로 수송하게 됨으로써 조창은 유명무실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조운 제도가 다시 정비되었으나 해안의 조창은 예성강 입구에 이르는 서해안 몇 군데에 그쳤고 남해안에는 영조 때에 이르러 설치하였다. 이 때 남해군의 조창은 노량에 있었다.

남해군에서는 "쌀 337석(石) 5두(斗) 3도(刀) 6합(合) 6석(夕), 콩 204석 9도 8합, 공작미(公作米) 188석 12두를 2월 노량조창에서 수봉하여 3월에 선박에 옮겨 싣고 전라도 순천 구도를 지나서 흥양 희연도(喜然島)와 장흥 우두도(牛頭島)를 거쳐 영암 갈두포(葛頭浦), 진도 벽파정(碧波停)과 나주, 역도를 거쳐 무안, 탑성도(塔聖島)와 영광 법성포를 거쳐 무장 안변포(安邊浦)와 만경, 군산, 옥과, 통죽도(統竹島)를 거쳐 충청도 당진 원산도(源山島)와 해미, 안흥, 정양, 구미포(仇味浦)와 태안, 서근포(西斤抱)를 거쳐 보령, 난지도를 거쳐 경기도 부평, 수취도(水就島)와 강화 갑고지포(甲古之浦), 연미정(燕尾停)을 거쳐 보상강(寶上江)을 따라 갈두, 마포, 용산에 이르면 25일 정도에 도착하나 해운은 육로와 달리 바람이 불면 가고 바람이 없으면 가지 못하니 체류하는 여러 날을 일일이 계정하기가 불가능하여 서울에 도달 되기가 한없이 지체되니 군자창 및 선혜청에 납고할 쌀 33석 5두와 전세를 일시에 수봉하여 바다 배에 싣고 선소 앞바다를 경유하여 다대포진 앞바다에서 동래, 부산창에 납부한다"고 『진주진관지』에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군자창은 조선시대의 창고로 전국의 군전(軍田 : 군인을 양성하고 군인의 경비를 조당하기 위하여 경기 이외에 있는 외방의 토지를 하급군인에게 나누어준 전지)으로 부터 받아들인 군자곡을 저장하였으며, 선혜청은 상평창(常平倉)을 개칭한 것으로 대동법에 의한 대동미와 포(浦), 전(錢)의 출납을 맡아보던 곳이었다. 위와 같이 선소가 조운의 구실을 하면서 군항을 겸하고 있었다.

 

▶ 봉수(俸燧)

 

(1) 개요

동서양의 고대국가에서부터 군사상의 통신수단으로 많이 이용된 방법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고대부터 이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나 정식 법으로 제정하여 실시된 것은 고려 의종 3년 (1149) 서북면병마사 조진약(趙晋若)의 제의에 의하여 밤에는 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올리는 두 가지 방법이 실시했다.

군사상 요지로 생각되는 산꼭대기에 대략 수십 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봉수대를 설치하였고 평시에는 1회(一炬 혹은 一煙), 적의 모습이 나타나면 2회, 적이 경계에 나타나면 3회, 적이 경계를 침범하면 4회, 싸움이 벌어지면 5회로 긴급히 연락한다. 연일 접전이면 낭분을 사용하여 변경으로부터 서울 목멱산(木覓山 : 南山)에 이르게 하였다.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올 때는 봉수군이 차례로 릴레이식으로 달려서 보고하는데 서울에서는 오원이 병조에게 보고하고 지방에서는 오장에게 보고하였다. 봉수의 간선은 직봉이라 하여 동북은 경흥, 동남은 동래, 서북은 내륙으로는 강계 해안지방으로는 의주, 서남은 순천의 4개 처를 기점으로 하여 서울 목멱산을 종점으로 했다. 

직봉 외에도 간봉이라는 보조선이 있어 본붕 사이의 중간지역을 연락하는 장거리의 것과 국경 방면의 전선 초소로부터 본진 본읍으로 보고하는 단거리의 것도 있다. 서울에 도착하면 병조에게 이를 임금에게 즉시 보고했다. 

각 봉수대의 인원은 연해와 변경지방은 군사 10명, 오장 2명이 근무했고 이들은 다른 군역에 종사할 수 없고 오직 망보는 일에만 종사하였다. 봉화대는 표주를 세워 경계를 설정하고 거짓 봉화나 단순한 방화를 막론하고 그것이 경계선 백보 이내에서 일어났다면 병조에게 관할 단속했고 백보 외에서 일어났을 때는 진영에서 단속했는데 이들은 대개 사형에 처했다.

 

(2) 남해의 봉수

남해의 진산 망운산(해발 785cm)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봉수대는 남해의 전역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관망이 높은 곳으로 여수해협과 노량해협 그리고 강진만이 보이고 멀리는 창선도와 금산까지 첨망된다.

남해의 봉수대 연결은 금산봉수대에서 제2거선 방향으로는 망운산봉수대를 경유하여 금양부곡 양둔산으로 연결되어 본선과 접선하였고 또는 금산봉수대에서 소흘산봉수대를 경유하여 제5거선인 순천 돌산봉수대로 연결되어 본선으로 접선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망운산봉수대는 단종 2년(1454) 1월 12일 혁파되었다.

 

단종 10권 2년 1월 12일(1454)

병조에서 전라도·충청도·경상도 도체찰사(都體察使)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남해현(南海縣) 망운산(望雲山)·성현(城峴) 두 봉화(烽火)는 아울러 모두 긴요치 않으니, 청컨대 이를 혁파하소서, 그 군인들은 성현 방호소(城峴防護所)에 옮겨 붙이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지리지 곤남군조에 이르길 "봉화가 3곳이니 금산은 남해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본도 소흘산에 응한다. 소흘산은 서쪽으로 망운산에 응한다. 망운산은 남해도 남쪽에 있다. 북쪽으로 진주 금양 부곡의 양둔에 응한다."

 

앞의 기록으로 보아 망운산 봉수대는 폐봉(廢烽)되기 전 단종 2년까지 남해의 상황을 육지로 연결하는 봉수역할을 하였으며, 폐봉 이후에는 금산봉수대에서 창선 대방산을 거쳐 육지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망운산 봉수대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나지만 다른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각 문헌을 통한 노선 도표를 정리하여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지리지』

 ↱소흘산 ↱계화산→건대산(전라도)→제5거선

금산→망운산→양둔산→각산→침지→성황당→광망진산→광제산→입안→제2거선

↳좌이산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대방산→각산→안점산→망진산→광제산→입암산→제5거선

↳소흘산 ↳우산

 

『여지도서』

↱원산

소흘산→금산→대방산→각산→안현→망진→광제→입암→입안→제2거선

↳고돌산(순천)→제5거선

 

『경상도읍지』

금산→대방산→각산→안점산→망진산→광제→입암→제2거선

↳소흘산→고돌산(순천)→제5거선

 

『영남읍지』

금산→대방산→각산→안점→망진산→광제산→안암산→제2거선

↳설흘산

 

여기에서 남해봉수와 관련되는 제2거선과 제5거선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2거선

직봉(直烽) : 동래→양산→언양→경주→영천→신령→의흥→의성→안동→예안→영천→봉화→안동→순흥→영천→풍기→순흥→단양→청풍→충주→음성→충주→죽산→용인→광주→한성

간봉 : 금산→대방산→각산→안점산→망진산→광제산→입암산↗

 

○ 제5거선

직봉 : 순천(돌산도 방답진)→흥양→장흥→강진···  · 강화→김포→양천→한성

간봉 : ↖순천 성황당

 

그 외 제1거선은 경흥에서 출발하여 철원, 포천, 양주를 거쳐 경성에 도착하고, 제3거선은 강계에서 출발하여 평양을 거쳐 파주, 고양, 한성에 도착하였으며, 제4거선은 의주를 출발하여 개성을 거쳐 교하, 고양, 한성에 도착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남해현 봉수조에 따르면, 금산봉수는 북쪽으로 진주 대방산(臺方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소흘산(所訖山) 및 원산에 응한다. 소흘산 봉수는 동쪽으로 금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원산에 응한다. 원산 봉수 동쪽으로 금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소흘산에 응한다고 하였으며 진주목 봉수조 대방산봉수는 진주와 104리에 있고 남쪽으로 남해현 금산봉수에 응하고 북으로 각산에 응한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