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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역사

고려시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내용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출처
남해군-남해군지

상세내용

▶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조선후기 문신 홍양호(洪良浩)가 역대 명장들의 행적을 정리한 전기이며, 정조 18년(1794)에 완성하여 순조 16년(1816)에 간행하였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인조 때까지로 정사의 열전형식으로 해당 인물들을 왕조별로 서술하였다. 6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정지장군은 권3에 전기가 실려 있다. (규장각 소장)

 

장지의 초명은 준제로 나주인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형상이 괴이하며 유아시절부터 대지를 품고 독서하기를 즐기더니 학문의 대의를 통달하여 출입할 적에도 항상 서적이 따르더라. 공민왕 23년에 중랑장 이희가 왕에게 상서하여 청하니 가상하다 하시고 말하기를 이희는 평범한 보통 신하로서 항상 현책을 올리는 것이 이와 같다. 백관과 위사들 중 이희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위사 유원정이 아뢰길 "중랑장 정준제는 왜구를 일찍이 초평시킬 계책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직 왕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정지를 속히 불러 시전하라" 하므로 왕은 즉시에 정지를 불러 묻기에 정지는 취지하고 마음 속에 감추었던 모든 일을 헌왕하니 왕이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며 정지를 전라도안무사로 배수하였다.

겸하여 왜인추포만호 박덕무 또한 상서하여 이희와 정지의 방책으로써 박덕무를 경기왜인추포부사로하고 제상들에게 말하기를 이번 벼슬은 이희 등과 경들을 달리 하고자 하는 생각은 말고 성공하면 인심이 격동할 것이요 만약 공을 세우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지역과 휘하 사병 85인, 이희 67인과 첨설직(添設職) 영밀직사(令密直司)를 합하고 정지와 이희에게 천호공명패(千戶空名牌)하고 이천백호는 패(牌)하고 이백시(二百時)를 정지에게 주었다. 이희는 재삼 상소하여 무릇 십조라는 숫자는 약이라는 수라 육지 깊숙한 백성들은 한사하고 삿대와 올해 내로 왜적을 방위하기가 어렵다.

다만 침생이 장해도(長海島)에서 령신 등을 기다린 지 5년 만에 청해도 순문사 같은 고로 헛되게 낭비를 하지말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 먹이고 걸식하지 않았다. 왕이 순찰사 최영(崔榮)을 불러 의(議)를 듣고 최영 의견으로 순찰 6도에서 전함 2천척을 건조코자 령(令)하니 제도군포왜민(諸道軍捕倭民)이 모두 염증을 느끼고 집을 허물고 도망쳐 흐트러진 집이 십오육호에 이르렀다. 이로써 정지 등은 건의한 일을 백지화하니 마침내 조정이 조용해졌다.

우왕 3년 여름 왜구들이 순천·낙안 등 처에 웅거하니 정지는 예의판서로서 순천병마사가 되어 왜구를 공격 참수하고 3명을 생포하니 판사 정양기가 승첩했음을 보고하였다. 우왕은 정양기에게 백급 50량과 그의 모친에게 백미 10석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정지에게도 안마와 비단을 하사하였다.

겨울에 또 왜구를 공격하여 40여급을 참수하고 2인을 생포하였다. 판사 정용을 보내 승첩을 보고하니 우왕은 정용에게 포(布) 250필과 말 1필을 하사하였다.

우왕 4년에 왜구가 영광·광주·동복 등처에 침략하여 있기에 정지는 도순문사 지용기와 조전원수 이림(李琳) 등을 도와 싸워서 옥과현까지 쫓으니 미라사에 적이 들어간 것을 아군이 포위한 후 불을 지르고 계속해서 공격을 하니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말 백여필을 포획하니 이 전쟁은 정지의 공이 많았다. 승첩의 위로로 정지와 지용기에게 은 50량씩 하사하고 또 왜구가 담양현을 쳐들어오므로 정지는 지용기와 더불어 공격하여 17급을 참수하니 전라순문사가 방문하였다.

우왕 8년에는 해도원수로서 왜선 50척이 진포항으로 들어오므로 정지는 공격을 멈추지 않고 뒤쫓아가 군산도에 이르러 4척을 포획하였고 9년에 또 우왕이 금요대 한 벌과 백금 50량을 하사하였다.

정지가 전선 47척을 이끌고 나주·목포를 지키고 있을 때 왜선 120척이 경상도로 들어오니 연해의 주군에서 놀라 크게 떨었다. 합포원수 유만수가 급함을 고하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독행하며 스스로 노를 저으니 노 젓는 병사들은 더욱 진력을 다하여 섬진강에 도착하여 사졸을 징집할 때 합포사졸들은 적이 이미 남해 관음포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때마침 비가 오는지라 정지는 지리산신사에 사람을 보내어 비는데 정지가 빌기를 "나라의 존망이 이번 일거에 있습니다. 사사로히 하고자 하오나 서로 주고 뺏는 것을 무작정하는 일이옵니다. 신에게 제수를 바치옵니다"그러자 비는 개이고 적의 가치는 하늘을 덮었고 검과 창은 바다를 빛내며 사방을 둘러 싸놓고 있는 정지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였다.

하늘은 갑자기 비가 멈추었고 중류에서 바람이 알맞게 불어 돛을 달고 질풍과 같고 용과 같은 위세로 박두양에 이르니 적의 대선 20척을 선두로 배마다 굳센 사졸 140명씩을 태우고 오므로 정지는 진격하여 크게 부수니 죽은 시체가 바다를 덮었고 화포를 발사하여 적선 17척을 불태웠다. 정지는 말하기를 "말(馬)이 땀이 나도록 싸워 적을 부순 적은 있으나 이번처럼 크게 파한 일은 없었다. 금일의 쾌재라하였다" 대승첩 소식을 우왕에게 이르니 크게 기뻐하며 궁온을 하사하고 궁중에서 술을 빚고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 대첩 때 군기윤 방지용이 왕명을 받들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왜적을 만나 파금되어 묶여서 선창에 구금되었다. 이에 적도가 말하기를 만약 이 전투에서 지게되면 너를 죽이겠다 라고 말하고 출전을 하였는데 적병이 살아 돌아오지를 못해서 방지용은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다.

정지는 이 관음포대첩에서 승첩하고 병으로 사직하였다.

후에 정지는 지문하부사가 되었고 해도원수로 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가 되었고 10년을 문하평리가 되었다.

왕은 환관 김실을 보내어 정지를 문책하기를 도통사 최영이 전함을 만들어 수전에 대비케 하고 아울러 화포까지 용의가 주도하였는데 경은 해도도원수로서 왜구가 연해주군을 침노하는 것을 아직도 소탕하지 못하는 것은 경의 죄라 하였다.

정지는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상서로 동정을 자청하여 말하기를 "중국에서 왜구를 정벌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만약 이 나라 안에 양 나라 함대를 나누어 정박시키게 되면 지변과 접대의 어려움 뿐 아니라 우리 국정의 허실에 대한 비밀이 알려져 국난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왜구는 일본 전체가 아니라 반민들과 유랑민들이 대마(對馬), 일기(一岐) 등의 제도에 웅거하여 거리가 가까운 우리 동남쪽 지방을 무시로 침입한 것이니 도적떼들이 있는 제도를 대거 선공하여 뿌리를 뽑는 한편 일본에 국서를 보내어 누적을 귀순케하면 왜환은 영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은 이유가 없어 출병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수군은 수전에 전능하니 옛날 일본 정벌 때와는 다르므로 시의에 순풍 때 출사하면 성공할 것입니다.

단, 함선이 오래되면 오우부(杇又腐)하고 사졸이 노쇠하면 피차폐(疲且弊)함은 불멸의 철칙입니다. 이제 선졸 즉 수병들은 조련의 강행이 난심해서 속전 아니면 도산을 꿈꾸고 있으니 이 기회를 잃지 말고 하루 속히 왜구의 소혈을 소탕 분쇄할 것을 결책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태조가 요동정벌 할 때 정지는 안주도도원수로 되어 있었다. 태조는 요통정벌을 중지시키고 회군할 것을 결심한 후 제군을 돌이켜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때 왜구는 3도에 여름부터 가을까지 여러 주군을 도소 분략함이 막심했으나 장수나 수령들이 능히 막을 자가 없으므로 왜구들에게 위명을 떨친 정지를 양광전라경상도도지휘사로 삼아 제장과 함께 이를 치게 하였다.

극형으로 처단할 것을 선언하더니 정의감이 강한 정지를 하늘이 도왔는지 청주옥에 대홍수로 수재가 나서 3년을 면하게 되었고 옥이 유실되어 극형을 면하게 된 후 죄가 무고하는 것이 판명되어 곧 풀려났다.

회군공신이 행하여져 정지는 2등공신에 녹(錄)하고 녹권과 전 50결을 내리었다. 광주로 퇴거하여 있던 중에 판개성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임하지 못하고 45세의 일기로 병사하였다. 시호는 경렬이다. 

 

▶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고려 명신·도학자·충신·효자·열녀·일민의 행적을 적은 글로써 순조 22년(1822)에 남공철(南公轍)이 편찬하였다. 권1에서 권11에 걸쳐 본전 인물 200인, 부전 인물 82인 모두 282인의 행적을 수록하였다.(규장각 소장)

『해동명장전』에 있는 내용 중 우왕 10년 문하평리 이후 환관 김실을 보내어 정지에게 문책한 부분은 『고려명신전』에 빠져 있다.

『해동명장전』에는 없지만 『고려명신전』에 들어 있는 기록은 진포에서 왜구를 대파한 이후와 남해 관음포대첩 사이에 "봄이 역질이 만연하여 사졸 태반이 배 위에서 죽기에 육지로 옮겨 장사를 지내 주었고 정지도 질병에 걸린 것을 우왕은 산기 하충국(散騎 河忠國)을 보내어 문병 위로하고 의약을 하사하였다."는 것과 함양에서 남원까지 침입한 왜구를 도순문사 최운해, 부원수 김종연 등을 통사로 하고 원수 김백흥에 "진원서(陳元瑞), 전주목사 김용균(金用鈞), 양광도상원수 도흥, 부원수 이승원(李承源) 등을 조전케 하여 적을 쳐서 대파하여 58급을 목 베고 말 60필을 포획했다." 는 내용, 그리고 말미에 청주옥에서 참형이 선언된 이후에 "사람이 나면 한번은 죽는 법인데 죽고 사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 마는 그러나 왕씨가 나라를 찾는데 있어 내가 죄 없이 죽는 것이 진실로 슬픈 일이다."라는 내용이다.

 

▶ 유적

(1) 남해군 유적

남해군에 잇는 정지장군의 대표적인 유적은 고현면 대사리 중앙동에 있는 정지석탑(경남 문화재자료 제42호)이다. 정지석탑에 관한 내용은 제4편 문화관광 중 지정문화재 부분에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으므로 생략한다.

이 밖에 유적으로는 지금은 없어진 임진성 기념각 내에 있었던 경렬공 정지장군 사적비가있다. 1977년 마을 출신 하주형(河周亨, 작고)씨가 임진각기념관(壬辰閣記念館)을 설립하고 본인이 수집한 각종 유물을 전시하면서 비를 세웠다.

비신 크기는 높이 146cm, 넓이 51cm, 두께 22cm이고, 좌대의 크기는 가로가 92cm, 세로 58cm, 높이가 11cm이다. 비문 정면에는 "경렬공정지장군사적비(景烈公鄭地將軍事蹟碑)"라 적혀있고 좌측과 후면에는 일대기와 관음포대첩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다. (내용은 정지장군의 업적에 관한 내용과 동일함)

우측에는 정지장군유적보존회, 임진성 기념사업회, 남해군 남면문화재보호위원회 감수라고 상단에 기록되어 있고 하단에는 진양후인(晉陽后人) 하천수(河千秀) 근찬(謹撰), 종후손(從後孫) 주상(周相) 근서(謹書)라 기록되어 있다.

임진성 기념관(2층 블록, 건평 약 40평, 부지 약 50평 정도)은 관리 소홀로 전시품은 전체가 도난 당하고 건물도 흉물스럽게 폐허가 되었다. 임진각기념관에 위치한 경렬사 사적비를 2004년에 임진성 동문 입구에 이전 복원하였다.

 

▶ 남해군 외 유적

정지장군의 대표적인 유적은 고향인 나주와 고아주에 남아 있다. 1921년 문중에서 건립한 나주 경렬사는 도기념물 제196호로 2001년 12월 13일 지정되었다. 광주 경렬사는 인조 22년(1644)에 건립되어 유품 및 철제 환삼 등을 소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당 향사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78년에 사당 복원공사가 착공되어 1981년 12월 28일에 준공되었다.

경내에는 정지장군 예장 석묘(1975.12.30, 전남도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가 다시 1986년 12월 24일에 광주광역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호로 지정)가 있다. 그리고 경렬공 정지장군 사적비, 경렬사 유허비, 유적정화 기념비, 내삼문, 외삼문, 기념관 등이 있다.

정지장군 철제 환삼은 보물 제336호로 1960년 1월 20일 지정되었다. 광주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환삼은 수백 개의 쇠 조각으로 만들어진 갑옷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철제 조각 하나를 떼어 삶아 물을 마시면 학질(말라리아)이 완쾌된다고 하여 주민들이 일부를 떼어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