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고려시대
삼별초 남해 주둔
상세내용
▶ 삼별초의 역할
삼별초(三別抄)는 40여 년간(1232년~1273년) 자주정신과 항몽정신으로 장기간의 대몽항쟁을 수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글안(거란), 여진, 몽골 등의 북방 이민족이 침입했지만 그때마다 고려는 그들을 슬기롭게 격퇴하였다. 특히 삼별초의 항몽은 일시적 감정이나 사사로운 병란이아니라 국토를 수호하고 몽골에 항복한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투쟁이었다.
삼별초란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 신의군(神義軍)의 통합된 이름으로 좌우별초는 본래 최우(崔瑀) 집권기에 설치한 야별초(夜別抄)가 규모가 커져 좌우 양부로 나누어 진 것이고 신의군은 몽골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군사들로 편성되었다. 삼별초는 국토수호를 위한 군사적인 활약을 주로 하였고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한 경찰적인 활동도 동시에 수행하였다.
삼별초는 당시의 권력 구조 내에서 정치적으로 중립의 입장을 취하는 전통적인 중앙군이 아니라 역대의 권신들과 파벌적으로 깊이 유착되어 무인정권을 보위, 옹호하는 무력의 구실도 하고 있었다.
고려병제의 근간이 되었던 2군6위(二軍六衛)가 유명무실하게 되자 삼별초가 국가의 안보와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원종 6년(1261) 7월에 "남도 연해주군에 나타난 왜구들을 명장군 안홍민(安洪敏)이 삼별초를 인솔하여 방위를 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삼별초는 고려의 정의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삼별초는 고종 19년(1232) 철래탑(鐵來塔)의 제1차 침입에서부터 고종 46년(1259) 차라대(車羅大)의 제6차 침입까지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원종 11년(1270)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고 몽골의 지시에 따라 개경환도를 단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강화도 내부에서는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대몽골 타협파와 무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강경파가 대립하였다.
몽골의 억압에 의하여 고려의 오랜 근거지이며 항전의 군사기지인 강화도를 버르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 삼별초는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일반 민중들도 친몽적인 왕실파의 패배주의적(敗北主義的) 태도에 대하여서는 비판적이었다.
원종은 상장군 정자여(鄭子璵)를 강화로 보내 삼별초를 달랬지만 실패하자 장군 김지저(金之底)를 보내 삼별초를 혁파하고 명부를 압수케 하였다. 그러자 배중손(裵仲孫)과 노영희(盧永禧)등은 본격적인 항몽의 기치를 들었다.
고려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대장군 유존혁(劉存奕)과 이신손(李信孫)을 승선(承宣)으로 삼고 왕의 좌우에 있게 하였다. 이는 몽골에 굴복한 원종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고려에 대한 반역이었으므로 강화에 있던 조관 가운데에는 육지로 빠져나가는 자가 적지 않았고 수졸도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삼별초는 강화를 지키기 어렵게 되자 선함을 모아 공사의 재회와 백성, 노비를 모두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삼별초가 강화의 서북 해안으로 빠져나가 남으로 내려갈 때 천여 척의 배가 서로 줄을 이었다고 한다.
삼별초는 진도에 들어간 뒤 용장성(龍裝城)을 쌓고 궁전을 크게 지어 도성으로 삼았다. 진도를 수도로 한 삼별초의 활동은 매우 왕성하였고 남해, 창선, 거제, 제주 등을 비롯한 30여개의 섬을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남해도에는 유존혁이 웅거하면서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였다.
삼별초는 북으로는 변산반도, 동으로는 거제까지 장악하는 등 세력을 키웠다. 고려는 김방경을 역적추토사로 임명하여 토벌하고자 했으나 삼별초군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고려정부는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역으로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원종 12년(1271) 여몽연합군의 총공격으로 진도는 함락되고 승화후 온과 배중손은 전사하였다. 진도에서 패배한 삼별초군은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로 옮겨 항전을 계속 했지만 김방경과 몽골장수 홍다구, 훈도 등이 이끄는 1만 명의 토벌군에 의해 원종 14년(1273) 완전히 전멸하였다.
비록 삼별초의 항몽은 실패로 끝났지만 지닌 의의는 지대한 것이었다. 첫째, 국권을 회복하고 국토를 수호하기 위한 자주정신과 호국사상을 끝까지 발휘하여 적극적으로 항몽 항쟁을 하였고, 둘째, 어려움이 겹칠 때에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으로 민족의 의지를 발휘하여 국토와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였고, 셋째, 국가가 국난에 처하자 민중과 함께 항쟁을 하였다.
▶ 남해현의 삼별초 항몽과 승선 유존혁
남해군과 관련된 삼별초의 기록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5월조에 보인다. 남해에도 삼별초의 수장격인 승선(承宣, 왕을 보좌하는 벼슬) 유존혁이 주둔하였고 남은 배 80여 척을 데리고 도망을 갔다는 것은 상당히 큰 규모의 본거지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남해가 진도 용장성에 버금가는 삼별초의 제2 별동부대의 본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적장 유존혁이 남해현에 웅거하면서 연해에서 노략질하고 조공선을 탈취하다가 삼별초가 패하여 탐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배 80여 척을 거느리고 따라 갔다.
남해의 본거지가 어느 곳이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추정하여 보면, 남해군 서면 서호리에 위치하고 있는 재앙궁터, 혹은 장군터 또는 대장군지라고 예부터 불러진 곳이 있다. 이곳은 입구를 제외한 삼면이 산맥이 이루어져 자연 성곽으로 만들어져 있고 입구 반대 방향 바다 건너에는 전남 여수와 순천이 마주하고 있다.
그 사이로 서해안과 동해안을 왕래할 수 있는 해로가 가로질러 있다. 위치적으로 보아 진도와의 왕래가 용이하고 경상도에서 개경까지 조운되는 조공선을 탈취하기에는 적합한 곳이다. 그곳에 양호한 성터와 성곽이 남아 있는데 진도의 용장성을 쌓은 수법과 비슷하게 축성되어 있다.
성곽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고 구전만 전하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에 장군이 살았다고 하는데 그 장군이 조공선을 부채로 부쳐서 이곳까지 불러 들여 약탈을 자주하기에 조정에서 군사를 풀어 그 장군을 잡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내용을 볼 때 당시의 상황과 지리적 조건, 그리고 현존하는 성곽, 주위의 배경 등이 흡사하므로 삼별초가 주둔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천여 명 이상으로 보이는 삼별초군의 숙식을 해결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어 보인다. 성터의 건물지가 협소하고 농토가 적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공선을 탈취하여 양식을 충당한다 해도 어려운 지형이다. 이곳은 남해 삼별초군의 경계 초소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본군은 옛 사찰과 같은 기존의 건물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아있는 성터가 협소하기에 본진의 웅거지역을 다른 곳으로 비정한다면, 관음포구가 있는 현재의 고현면 일대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이곳은 고려대장경의 판각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고려대장경분사남해대장도감이 있던 곳으로 추측되며 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에서 대장경판이 끝나는 것은 1251년이지만 삼별초군의 주둔이 이루어진 1279년과는 14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으므로 판각장소의 기존 시설물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남해에서의 대장경 판각은 1236년부터 1251년까지지만 그 이후로 계속 다른 판각사업들을 진행했을 수 있었고 삼별초 주둔이 1270년이므로, 남해는 1236년부터 1279년까지 34년동안 대몽항쟁을 위한 고려의 국가적인 자주정신을 일깨워준 곳이다.
그리고 남해군 창선면에 소장하였던 국사를 원종 10년(1269)에 진도로 옮기게 되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볼 때, 삼별초가 개경정부를 인정치 않고 진도에 새 정부를 세우기 1년 전의 일로 남해가 삼별초의 중요한 본거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남해는 몽골이 침입에도 불구하고 안전지대로 국사가 소장되어 있었고 고려대장경의 판각과 삼별초군이 주둔하였던 곳이다.
남해에서 대몽항쟁을 이끌었던 유존혁(劉存奕)은 고려 원종 때 대장군을 지낸 실존 인물이다. 1270년 고려가 몽골과의 강화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 배중손(裵仲孫)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삼별초를 일으켜 반란군 정부의 상서좌승(尙書左丞)이 되었다. 삼별초군이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후, 남해현을 거점으로 인근 고을을 장악하였다. 1271년 다시 거점을 제주도로 옮길 때 배 80여 척을 이끌고 제주도에 들어가 몽골군과 몽골에 항복한 고려정부에 끝까지 대항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유존혁은 거창 유씨(劉氏)로 도시조(都始祖)인 유전(劉筌)은 중국 유방(劉邦)의 41세손이다. 유전은 송나라에서 병부상서를 지냈고 팔학사(八學士)의 일원으로 고려 문종 36년(1082) 8월에 고려에 들어와 경북지방 영일군에 정착하여 살았다. 유전의 장남 유견규(劉堅規)가 거창의 옛 이름인 거타군(居陀君)에 봉해짐에 따라 후손들이 본관을 거창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유씨는 3파로 나누어지는데 거창 유씨는 도시조 전의 장남이 시조가 되고 강릉 유씨(江陵 劉氏)는 전의 9세손인 유승비(劉承備)가 시조가 되고 백천 유씨는 8세손인 유국추(劉國樞)가 시조가 되어 현재까지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유존혁이 1269년에 대장군 직을 수행한 것과 시조 전이 중국에서 고려로 들어온 1082년과는 182년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볼 때 유존혁은 유전의 6세손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강릉 유씨와 백천 유씨는 아니고 거창유씨로 보아진다. 거창 유씨는 거창 지방에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높은 관직을 두루 지냈음을 세계보(世系普)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유존혁이 세계보에 실리지 않은 것은 당시 몽골에 굴복한 고려정부를 반대하고 강화에서 새 조성을 구성할 때, 승선이란 높은 벼슬을 가지고 왕으로 추대한 왕족 온(溫)을 옆에서 보좌하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역적으로 판단되어 세보에 기록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