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고려시대
고려시대
상세내용
▶ 개관
왕건은 918년 태봉의 국왕인 궁예를 축출하고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했을 때 고구려계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해 왔다. 태조 왕건은 이들을 우대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들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한 후 1392년 공양왕 때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인해 멸망하기까지 475년간 한반도를 지배하였다.
고려는 여진, 몽골 등 외세의 침입을 줄기찬 항쟁으로 극복하였다. 한편, 전시과제도, 관청설치, 양전사업, 호적작성 등을 실시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유학을 발달시켜 문치주의가 성행하였고, 우수한 시인들이 많이 등장하였는데 특히, 생활을 충족하기 위해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창작하였고 공예품과 생활도구, 불교의식 도구 등이 발전하였다.
태조 원년(918)에서 예종 17년(1122)까지의 고려 전기 204년은 고려의 흥륭시대로 기초가 굳어지면서 제도와 문물이 정비되고 발달된 시기였다. 인종 원년(1123)에서 공양왕 4년(1392)까지의 후기는 동란시대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정중부의 난, 거란·몽골 등 북방족, 왜구, 홍두적(紅頭賊) 등의 침공으로 내우외환이 연속된 시기였다.
특히, 의종 24년(1170)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무인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살육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원종 11년(1270)까지 약 100여 년 간 무인정권기라는 특이한 현상이 지속되기도 하였다.
고려는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국가적인 호국신앙으로 불교가 융성하게 되었다. 거란과 몽골 등 외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불력의 명호를 받아 외적을 퇴치하고 국권을 지키려는 염원으로 현종과 고종 때에 전후 2차에 걸쳐 대장경을 조조(造條)하였다.
고려시대 남해군은 불력으로 몽골을 물리치기 위해 조조된 팔만대장경의 판각(1236~1251)지였으며, 1269년에는 창선도에 있던 국사의 사고를 진도로 옮겼다. 1270년 삼별초 항몽 시기에는 대장군 유존혁이 약 1년간 주둔한 근거지였다. 1383년에는 해도 원수 정지장군이 관음포에서 왜선 120여 척을 물리친 관음포대첩이 있었다.
▶ 지방제도 개편
남해군은 『고려사』 태조 10년(927) 4월 임술조(壬戌條)에 의하면, 전이산향(轉伊山鄕, 구전야산군)과 노포향(老捕鄕, 구 난포현), 평서산향(平西山鄕, 구 평산현)이라고 하였다. 성종 14년(995) 전국을 10도로 개편할 때 진주·합주 관할의 행정구역이었던 산남도의 영현인 남해군이 남해현으로 개칭되었다가 현종 9년(1018)에 실시된 대대적인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남해현이라 하고 현령을 두었다. 창선면은 창선현으로 진주에 속하였고 충선왕 때 흥선현(興善縣)으로 개명되어 역시 진주에 속했다.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마감된 남해군의 행정관청인 남해현성의 위치는 대체적으로 현재의 비란리에 있는 성산석성 즉, 문헌상에 보이는 고현산성 또는 고현성으로 비정하여 왔다. 그러나 이 성의 축성연대는 조선시대 읍성임을 밝히는 읍성기가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곽의 축조 기법상 신라나 고려의 축성법으로 볼 수 없다.
지명의 고착성을 근거로 자료를 확인해보면 남해현성의 위치는 남해군 고현면 남치리 마을로 추정된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산이 마을을 둘러 있어 천연요새임을 보통 사람도 느낄수 있다. 남치리(南峙里)는 지명해석 방법론으로 살펴보면 관풍안의 풍의 형태로써 역사적 사실과 연관된 지명임을 소지명들과 유적의 흔적을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
남치리는 남쪽에 인위적으로 축성한 곳을 바라보는 마을이란 뜻이다. 이를 입증하는 소지명은 성안 또는 담안이라 불리는 지명으로 성 안쪽에 형성된 뜸이었는데 지금은 동남치마을로 되어 있다. 현재의 북남치를 기준으로 보면 남쪽에 축성된 성곽은 석축으로 된 대국성과 오래된 토성과 내부의 우물을 확인할 수 있다.
성산토성이 고려시대의 남해현성으로 추정되어 오고 있지만 고현면 남치에 존재했던 토성이 대국성보다 오래된 것으로 이 토성이 고려시대까지 현청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대장경 판각중에 축성된 성들이 판각 완료 후 이들 성으로 현성을 옮겨갔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
대국성 내부 발굴 작업에서 발견된 물을 저장했던 저장고의 형태와 토성의 우물이 매우 흡사한 것은 토성의 우물 형태로 대국성의 물 저장고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토성은 조선전도에 그 흔적이 토위라는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56년에 제작된 지도부터 이 토위의 흔적을 삭제함으로써 현재의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흥선현은 유질부곡이었다가 고려시대 창선현, 흥선현 등으로 개명되었다가 폐현되었다. 그 위치는 창선초등학교 주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에 이르러 남해군은 왜구의 잦은 침탈로 고려시대 행정치소를 선천으로 옮겨야 했던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정이오는 『교은문집』에 「남해읍성」이라는 제목으로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은 『동국여지승람』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정이오기」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남해현은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 진도·거제와 함께 솔밭처럼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 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지역이 왜국과 아주 가까워서 경인년(1350)부터 왜적의 침략을 입기 시작하여 혹 잡혀 가고 혹 이사하여 군의 속현인 평산·난포가 쓸쓸하게 사람이 없었다. 8년이 지난 정유년(1357)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진양의 선천에 야처하였다. 그리하여 토지를 지키지 못하고 공물과 세부도 바치지 못하였다."라는 「정이오기」의 내용으로 볼 때 고려말 남해군이 얼마나 처참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 때 왜구에 잡혀간 남해인들은 기능공과 여성들일 가능성이 높다. 남해군에서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다는 사실과 고려후기 도자기 파편과 남해군에 분포된 도요지를 볼 때, 이시기 잡혀간 기능공들은 대장경 판각이 종료되고 남해에 정착한 홍로수(대장장이)와 도공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남해군의 행정치소는 고려시대에는 복원되지 못했고 46년 후인 조선의 3대왕인 태종 4년(1404)에 이르러 복원되었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시대 존재했던 속현 둘은 복원된 기록을 찾을 수 없고 문헌상 폐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창선면은 "창선도는 본디 고구려 유질부곡인데 고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으로 승격시켜 청주에 예속시켰다. 충선왕이 즉위(1308)함에 왕의 이름자와 음이 비슷하다하여 흥선현(興善縣)으로 개칭하였고 훗날 왜구로 인하여 사람들이 함께 없어져 직촌으로 삼았다"라고 되어 있다. 창선도가 본래 고구려 유질부곡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 유민으로 구성된 부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구로 인해 폐현이 된 남해군의 수난기와 같은 시점에 창선현 역시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