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신라시대
남북국시대
상세내용
▶ 통일신라
1) 전야산군 설치와 남해군 개칭
통일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 되었다는 점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 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문무왕 18년(678)에서부터 신문왕 7년(687)에 걸쳐 지방행정구역을 획기적으로 재편하여 9주(州) 5소경(小京)을 완성하였다. 9주 아래에 117개 군과 393현, 1,360개의 방(坊) 혹은 동(洞)을 두었다. 신문왕 5년(685)에 거열주를 청주라 개칭하고 총관을 두었다.
○ 통일신라시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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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 |
5소경 |
군 |
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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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벌주(상주) |
금관(김해) |
10 |
30 |
신라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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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량주(양산) |
12 |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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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주(진주) |
11 |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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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주(광주) |
중원(충주) 북원(원주) |
27 |
46 |
고구려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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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약주(춘천) |
11 |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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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주(강릉) |
9 |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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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 |
5소경 |
군 |
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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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주(공주) |
서원(청주) 남원(남원) |
13 |
29 |
백제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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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주(전주) |
10 |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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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주(광주) |
14 |
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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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관,도독 |
태수 |
군수 |
령 |
지방관 |
『삼국사기』「신라본기」에 해당하는 권8과 「삼국사기지리지」권34(잡지 제3 지리1) 9항에 삼국시대 남해군의 지명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신문왕 10년 10월에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청주 관할의 11개 군 중 남해군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 10년(690) 봄 2월에 중시 원사가 병으로 그만두어 아찬 선원으로 하여금 중시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전야산군을 설치하였다.
○ 남해군은 신문왕 때 처음 설치한 전야산군으로 바다 가운데 섬이다. 경덕왕 때 개명되어 지금도 쓰고 있다. 영현은 둘이다. 난포현은 본래 내포현으로 경덕왕 때 개명되어 지금도 쓰고 있다. 평산현은 본래 평서산현으로 경덕왕 때 개명되어 지금도 쓰고 있다.
신문왕 때 처음 설치된 전야산군에는 내포현과 평서산현이라는 두 개의 영현을 두고 있었다. 신문왕 10년(690)에 편성된 청주의 속군은 한다사군(韓多沙郡, 하동), 전야산군(轉也山郡, 남해), 고자군(古自郡, 고성), 아호량군(阿戶良郡, 함안), 상군(裳郡, 거제), 궐지군(闕支郡, 산청), 속함군(速含郡, 함양), 거열군(居列郡, 거창), 대량주군(大良州郡, 합천), 대가야군(大伽耶郡, 고령), 일리군(一利郡, 성주)으로 11개 군이었다.
정덕왕 16년(757)에는 지방행정제도를 다시 개편하면서 명칭을 한문식으로 개칭하였다.
청주를 강주로 개칭하고 그 아래에 11군과 27현을 두었다. 강주에 속한 전야산군은 남해군으로 개칭되었다.
내포현은 난포현으로 평서산현은 평산현으로 개칭되어 고려 현종 9년(1018)까지 유지되었다. 강주의 속군은 역시 11개로 남해군, 하동군, 고성군, 함안군, 거제군, 궐성군(산청군), 천령군(함양군), 거창군, 고령군, 합천군, 성산군(성주군)이다.
2)평산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남해읍성에서 남25리라는 같은 거리상에 위치한 성이 평산포영, 평산폐현, 우개고보로 3개의 성이 나타나있고 그중에 평산폐현은 고적으로 되어 있다. 자리지를 살펴보면 점동리 지금의 두곡리와 평산포리 평산리의 거리가 25리이다.
남면 두곡마을 앞 유적을 고진성이라고 하고, 당항, 우형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고진곡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유적인 고진성이 축성된 이후에 당항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성을 중심으로 보면 고진곡은 우고개가 된다. 현재의 고진성은 우고개보로 수군이 주둔한 성이며 굴항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평산포영과 평산현은 현재의 평산리에 위치했음을 지명의 고착성을 바탕으로 알 수 있다.
평산현과 평산포영이 겹쳐 있는지, 분리되어 있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관당성과 고현성을 비교할 때 평산현성 아래쪽에 평산포영이 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평산포영 흔적은 바다를 메우는 데 활용되었지만 평산현성의 기단석 일부는 확인할 수 있다.
3) 난포현
『신증동국여지승람』고적 부분에 난포현은 남해읍성으로부터 동21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제원에 대한 기록은 없고 거리만을 기록하였다. 난포현성의 위치는 지명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지리지」에 난현내리가 동25리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현재의 난음리에 해당된다.
난포현의 위치는 지금의 비자당산으로 추정된다. 정상의 부위를 둘러 반원형으로 성곽이 있었으나 주변의 언막이 공사로 성벽을 헐어 마치 토석 혼축으로 된 듯 보이나 동남쪽에 일부 성벽이 남아 있어 석축성이었음을 알 수 있고 내부에 우물의 흔적과 기와 그릇 파편이 흩어져 있다.
동헌은 난음리 양지마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양지마을 동쪽을 객사골이라 부르고 있다. 객사는 공무로 현을 찾는 관리들이 머무는 곳이므로 현성 내에 있었다. 난음리 난곡소류지 뒷편 생원골, 서당골이라 불리는 곳에 향교가 있었다고 구전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자기와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 발해
고구려 멸망 이후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 땅은 당나라의 안동 도호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들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당은 이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당에 포로로 잡혀 있던 보장왕을 요동도독으로 임명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의 이러한 민족 분열 정책은 오히려 고구려 유민들의 동족 의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 698년 발해의 건국으로 이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발해는 영역을 확대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그런데 그 영역에는 고구려 유민과 원래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있던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이나, 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렀다. 발해는 내부의 분열과 거란의 침략을 받아 926년을 끝으로 멸망하였다.
▶ 후삼국
후삼국은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건국한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각축하던 시기이다. 신라 말의 왕위쟁탈전에 의한 중앙집권력의 약화와 농민에 대한 수탈로 수많은 반란 세력이 탄생하였다. 사벌주(현 상주)의 원종, 애노, 북원(현 원주)의 양길, 완산주(현 전주)의 견훤 철원의 궁예, 죽주(현 안성군 죽산)의 기훤 등이었다.
특히, 견훤은 진성왕 6년(892) 무진주(현 광주)에서 그의 위세를 떨치면서 도읍을 완산주로 옮기고 후백제왕을 자칭하면서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장악했다. 한편 궁예는 898년 송악(현 개성)을 도읍으로 정하여 후고구려왕이라 칭했으며, 901년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911년에 다시 국호를 태봉이라 고쳤다. 태봉은 평양에서 충청북도 일대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후삼국은 왕건에 의해 통일되었다. 왕건은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축출한 후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919년에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다. 935년 신라의 경순왕이 자진하여 항복하고 936년 견훤의 아들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 10년 전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고 후삼국이 통일됨으로써 한반도에는 고려라는 단일왕조가 성립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남해군은 신라와 후백제의 경계 지역으로 전란이 빈번한 지역이었지만 신라의 영토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