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가야시대
삼국시대
상세내용
▶ 고대국가의 성립
철기문화의 보급과 이에 따른 생산력의 중대를 토대로 성장한 여러 소국들은 그 중 우세한 집단의 족장을 왕으로 하는 연맹 왕국을 이루었다. 왕은 자기 집단 내부의 지배 세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나갔다.
이 과정에서 주변 지역을 활발하게 정복하여 영역을 확대하였고, 정복 과정에서 성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을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체제를 정비하였고, 집단의 통합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고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적인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고대 국가의 발전 과정은 선진 문화의 수용이나 지리적 위치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우리 역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서로 고대국가의 체제가 정비되고, 가야는 삼국의 각축 속에서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채 신라와 백제에 흡수되었다.
▶ 삼국의 성립
1) 고구려
삼국 중 제일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1세기후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정복 활동으로 강화된 군사력과 경제력을 토대로 왕권이 안정되었고 여러 부족들을 5부체제로 통합하여 통치 체제의 근간을 이루었다.
고국천왕 때에는 왕위 계승이 형제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전환되었고, 족장들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는 등 완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고구려는 한강 이북에서 민주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삼국 중 가장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며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등 막강한 국력을 과시했지만 연개소문의 사망 후 아들들의 분열로 국력이 약화되어,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2) 백제
백제는 기원전 18년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 온조가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고구려 게통의 유이민 세력을 결합하여 위례성(현 서울)에서 건국하였다. 3세기경에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한성이 함락되어 개로왕이 살해 당하자 중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으며, 성왕 재위시인 538년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사비(현, 부여)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이후 백제의 부흥군은 약 3년간 치열한 저항운동을 벌였으나 663년에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다.
3) 신라
신라는 진한 12개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이 결합하여 건국되었다. 초기의 왕위는 박·석·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는데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들 중에 한명을 이사금(왕)으로 추대하는 형식이었고, 주요 세력들은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6세기 초반인 지증왕 때 국호를 신라로 바꿨으며,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지증왕을 이은 법흥왕 때에는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완성하는 한편 532년 김해의 금관가야를 정복하는 등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장했다.
진흥왕은 551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상류지방을 점령한 후 2년 뒤인 553년 백제의 영토인 한강 하류지역을 공격하여 한강 유역 전부를 차지했다. 또한 562년 가야 세력의 맹주인 대가야를 멸망시키면서 낙동강 유역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660년 태종무열왕은 김유신을 앞세워 소정방의 당나라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뒤이어 668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당나라에 맞서서 백제, 고구려 유민들과 연합하여 676년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4) 가야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는 철기문화를 토대로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어 점진적인 사회통합을 거쳐 2세기 이후 여러 정치 집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3세기경에는 이들 사이의 통합이 한 단계 더 발전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체로 발전하였다. 이를 전기 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4세기 말 ~5세기 초에는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몰락하여 가야의 중심 세력이 해체되고, 가야 지역은 낙동강 서쪽 연안으로 축소되었다.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후기 가야연맹은 분열하여 금관가야가 신라에 정복당하였고, 가야의 남부지역은 신라와 백제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면서 가야연맹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5) 삼국시대의 남해군
(1) 소가야 소속 추정
남해군은 삼국의 성립기에 가야연맹에 소속되어 있었다. 가야연맹의 주요 국가로는 금관가야(金官伽伽倻, 현 김해지역), 아라가야(阿羅伽倻, 현 함안지역), 고령가야(古寧伽倻, 현 상주시 함창, 문경지역), 성산가야(星山伽倻, 현 성주지역), 대가야(大伽倻, 현 고령지역), 소가야(小伽倻, 현 고성지역)등이 있다. 가야연맹체에 속한 국가는 그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삼국사기,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가야 연맹 소속 국가는 최소 10개국에서 최대 32개국으로 추정되며 도시국가 형태의 나라들로 분립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학설에 의하면 남해는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고령가야에 속하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삼국사기』와『고려사』등에 고령가야를 지금의 함녕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삼국유사』에도 고령가야를 함녕이라 하였다. 함령군은 경북 상주시 함창읍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지금도 함창 김씨를 함령 김씨로 부르고 있다. 고려시대 함령군의 속현으로 가선현(嘉善縣, 현 문경시 가은면), 관산현(冠山縣, 현 문경시 점촌읍), 호계현(虎溪縣, 현 문경시 호계면)이 있고 이 일대가 고령가야이다. 고려시대 함령군이 강주(康州, 현 진주)의 속군이었기 때문에 고령가야를 진주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였던 것이다.
남해군은 정확하게 어느 가야에 속했는지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문화량현(蚊火良縣), 사수현(泗水縣, 현 사천시 사천읍), 상선현(尙善縣, 현 고성군 영현면)을 속현으로 하는 고성군을 중심세력권으로 하는 소가야에 인접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된 행정지명 변천과정에서도 남해군은 소가야에 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신라와 백제에 교차 편입
진흥왕 23(562) 신라는 대가야를 평정하여 6가야 연맹을 멸망시키고 신라에 복속시켰다. 그러나 거창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경권은 백제와의 영토 전쟁에서 두 국가의 점령지로 신라와 백제에 번갈아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가 멸망한 후 부흥 세력들은 임존성(任存城)과 거열성(居列城), 현 거창) 등지에서 신라에 항거하였다. 문무왕 3년(663) 백제의 거열성을 함락시키고 700여명을 베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행정구역상 남해는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이때 신라가 취하여 거열주라 하였다. 거열주는 9주 중 하나로 문무왕 5년(685) 청주(菁州, 현 진주)로 개편되었다. 남해군은 청주의 속군이었을 것으로 보여 남해군은 신라와 백제의 각축 속에서 행정구역의 변동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