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삼한시대
삼한시대
상세내용
기원전 15세기경에 히타이트 제국에서 본격적으로 철제무기를 생산하였으며, 기원전 12세기에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하면서 철의 생산기술이 서아시아로 보급되면서 본격적인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말인 기원전 5세기에 철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한반도에 철기문화가 보급된 시기는 기원전 4세기경이었다.
고조선 후기에 형성된 철기문화의 보급과 고조선의 멸망기를 전후하여 여러 개의 국가가 형성되었다. 훗날 고구려에 부속된 부여, 함경도 지역의 옥저, 강원도 북부에 동예, 초기 고구려, 한강 이남을 근거로 하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 등이 각축을 벌였다.
우리나라 여러 유적에서 철기와 함께 출토되는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청동기문화도 더욱 발달하여 한반도 안에서 독자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청동기시대 후반 이후 비파형 동검은 한국식 동검인 세형 동검으로, 거친무늬 거울은 잔무늬 거울로 그 형태가 변하여 갔다. 그리고 청동제품을 제작하던 틀인 거푸집도 전국의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토기는 민무늬 토기 이외에 입술 단면에 원형, 타원형, 삼각형의 덧띠를 붙인 덧띠 토기, 검은 간토기 등도 사용되었다.
사천시 늑도유적은 2003년 7월 2일 사적 450호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은 1979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존재가 알려졌으며, 1985년 이후 다섯 차례의 발굴조사를 한 결과 패총과 무덤유구, 주거지 등과 함께 중국계 경질토기, 일본계 야요이토기, 점토대토기, 반량전, 오수전, 한(漢)나라 거울 등 13,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에서 삼한시대로 이어지는 단계의 삼각형 점토대 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유적이다. 사천 늑도 유적은 고대국가 초기단계에 형성된 복합 유적으로써 한·중·일 간의 고대 동아시아지역 문화교류 증거를 보여주는 학술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남해군 역시 늑도와 마찬가지로 육지와 가깝고 어로와 농경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청동기시대를 지나 철기시대에 이르러 더욱 번성하였지만 대규모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현면 서도마에 조개더미가 남아 있어 철기시대 남해군의 문화를 볼 수 있다.
▶ 열국의 형성과 삼한
1) 부여
고조선의 멸망을 전후하여 한반도 주변에는 여러 개의 군장국가(君長國家)가 출현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로 발전하는 기틀을 다졌다. 가장 북쪽의 부여는 민주 쏭화강 유역에 자리잡은 나라로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침입으로 285년 수도가 함락되고 국왕 의려가 자살하는 치욕을 당했으며, 346년에는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침입을 받고 국왕 현(賢)과 5만여 명의 주민이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다. 외침을 견디지 못한 부여는 고구려에 합병되었다.
2) 고구려
부여 지배계급의 대립 과정에서 남하한 해모수의 아들 주몽은 기원전 37년 압록강 지류인동가강 유역의 졸본지방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구려는 산악 지대에 위치하여 평야 지대로 진출하기 위해 주변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국력을 키웠다.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 5부족 연맹을 토대로 발전을 거듭한 고구려는 한 군현을 공략하여 요동지방으로 진출하는 한편 옥저를 정복한 후 공물을 징수하기도 했다. 그 후 부여를 병합하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3) 옥저와 동예
옥저는 1세기 전후 낙랑군의 세력이 쇠퇴하자 부조현(夫祖縣)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3세기 전반 5,000여 호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던 옥저는 함흥평야라는 비옥한 조건을 갖추었지만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어 통합된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고구려에 부속되고 말았다.
강원도 복부의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은 동예는 가구수가 2만여 호에 달할 정도로 번창했던적도 있었지만 옥저와 마찬가지로 선진문화의 수용이 늦어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5세기 초반 북부는 고구려에 남부는 신라에 부속되고 말았다.
4)삼한
고조선 남쪽 지역에는 일찍부터 진(辰)이 성장하고 있었다. 진은 기원전 2세기경 고조선의 방해로 중국 한나라와의 교통이 저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만의 쿠데타로 고조선의 준왕이 신하들을 데리고 남하하면서 유이민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고조선 이주민들이 토착 세력과 결합하며 철기 문화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면서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들이 나타나 삼한으로 분립되었다.
마한은 천안·익산·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으로 발전해 나갔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두 10여만 호였는데, 그 중에서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에 달했다.
변한은 김해·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진한은 대구·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12개 국, 모두 4~5만 호였다. 그 중에서 큰 나라는 4,000~5,000호, 작은 나라는 500~700호였다.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삼한에는 따로 맹주가 있었지만 78개의 속국을 완전히 장악한 군주는 아니었고 군사적,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협력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삼한지역은 4세기 중엽에 이르러 마한지역은 백제. 진한지역은 신라에 통합되었고 변한은 가야연맹체로 남아 있다가 6세기에 신라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소멸하였다.
▶ 변한과 남해군
변한은 진국이 분화하여 삼한이 형성된 이후 4세기경까지 지금의 김해·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남도 지역의 정치 집단을 가리킨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살며 언어, 법속, 의식주가 같고 다만 귀신의 섬김이 다르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한과 변한은 같은 문화 기반을 가진 정치집단이며, "12개의 소국 이외에 독립된 거수(渠帥)가 있는 소별읍(小別邑)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상도 지역의 정치집단 가운데 진한 연맹체에 속하지 않은 세력들을 통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경상남도에 속한 남해군은 삼한시대 변한지역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 중 마한은 54개국의 연합체이고 변한과 진한은 각각 12개의 소국 연합체로 형성되었다. 『삼국지』에 나타나는 변진 24개국 중 변진이 붙은 12국은 변한에 해당하고 변진이 붙지 않은 국명은 진한에 해당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병도의 학설에 의하면 남해군과 연관된 변한 12국과 그 위치는 다음과 같다.
①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 지금의 밀양지역
② 변진접도국(弁辰接途國) : 지금의 함안, 철원지역
③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 지금의 사천, 고성지역
④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 지금의 진주지역
⑤ 변진낙노국(弁辰樂奴國) : 지금의 하동 고전, 악양지역
⑥ 변진군미국(弁辰軍彌國) : 지금의 곤명, 곤양, 서포, 옥천, 북천, 진교, 양보, 금남, 횡천지역
⑦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䓉馬國) : 지금의 고령지역
⑧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 지금의 성주, 개령 지역
⑨ 변진구야국(弁辰拘倻國) : 지금의 김해지역
⑩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 지금의 창원, 마산지역
⑪ 변진안야국(弁辰安耶國) : 지금의 함안지역
⑫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 지금의 동래, 거제 지역
위의 변한 12개국 중 남해군이 직접 속한 곳은 없다. 하지만 이병도의 위치 비정(比定)에 따라 그동안 남해군은 낙로국과 군미국에, 창선면은 고순시국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된 행정지명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남해군은 사천과 고성을 근거로 하는 고자미동국에 속하였으며 후에 가야연맹의 소가야 소속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러한 세 정치집단은 모두 남해군과 연접해 있어 남해군이 어디에 속하였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석곽묘 위주의 고분군으로 추정되는 창선면 물미 고분군의 존재로 보아 미루어 5세기경에는 남해에 유력한 정치집단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 고현면 도마리 조개더미
고현면 도마리 조개더미는 서도마 마을에서 삼봉산 줄기로 이어진 표고 50m의 얕은 야산의 동쪽과 북쪽 두 곳에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다. 현 지표 1~2m 아래 약 1,300여 평 되는 구릉에서 출토된 토기편이 김해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토기와 동일하며 김해기 조개더미라 부르고 있다.
조개더미 단안부에서 채집된 토기 조각을 통해 그릇의 모양을 충분히 알아 볼 수 있다. 구연부분은 목이 없이 외반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3cm 내외의 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기복부(噐腹部)에는 조잡한 격문승석문(格文繩席文) 등이 보여 김해 조개더미에서 채집된 토기의 문양과 일치하고 있다. 토기의 두께는 회색인 경우 0.4~0.5cm, 갈색인 경우는 0.6~1.2cm가 대부분이다.
채집된 패각류는 복족강 원시복족목, 이매패강 다치목, 벗굴과의 굴, 이매목강 담치목 담치과 담치였다고 한다.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되지 않고 있어 당시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주거지, 인골 등이 출토되지 않아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