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지형과 지세
남해군읍지
상세내용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
형식 : 고서 - 지리서
간행주체 : 단체/기관
역할: 편찬 남해군(南海郡)
간행지역 : 경상남도 남해군 /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간행시기 : 연도 1907년경
크기 : 세로(27.1) 가로(18.9)
판본 : 필사본
장정 : 사침선장(四針線裝)
수량 : 1책 12장
재질 : 표지_황지(黃紙), 본문_저지(楮紙)
표기문자 : 한자
도설 : 지도(채색) 1장 1면
인장정보 : 朝鮮總督府圖書之印 / 서울大學校圖書
내용 : 1907년경에 편찬된 경상남도 남해군 읍지이다.
남해군은 현재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남해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남해읍 서변리와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남해는 신라 신문왕 때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경덕왕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현종 때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공민왕대에 왜적에게 고을의 땅을 빼앗기는 일을 겪었다. 조선 태종대에 다시 해양현(海陽縣)을 설치하였으며, 얼마 후에 다시 남해현으로 칭하기 시작했다. 고종 32년(1895)에 남해현에서 남해군이 되었으며, 광무 11년(1907) 진주(晉州)의 창선면(昌善面)이 남해군으로 이속되었다.
남해군은 경상남도 동남단 하동부(河東府) 앞바다에 가로놓인 섬으로서, 서남쪽으로는 순천(順天), 서쪽으로는 광양(光陽), 북쪽으로는 곤양(昆陽), 북동쪽으로는 사천(泗川)과 고성(固城)에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대양(大洋)에 면해 있다. 면적은 남북으로 100리, 동서로 70리이다.
본 읍지는 다양한 항목을 설정하여 20세기 초 남해군의 여러 면모들을 잘 전해주고 있다. 이를 통해 남해군 소재 산과 하천, 소속 섬들, 고을의 풍속과 물산, 사단, 봉수대, 진보, 고적, 비갈, 원우, 사찰, 지역 인물 관련 정보 등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남해 읍지는 현재 여러 종이 전해지고 있는데, 본 읍지의 체제와 구성은 다른 읍지들과 전혀 상이한 모습이며 기록된 내용 또한 많이 다르다. 사회경제적 부문과 관련된 내용은 모두 빠져 있으며,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들은 상대적으로 상세하다. 다른 남해 읍지 기록들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남해 지역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자료이며, 일반적인 읍지들과는 전혀 다른 체제와 구성을 가진 읍지라는 점에서 읍지의 유형과 계통, 20세기 초 읍지의 특징과 변화를 연구하는 데에도 참고가 될 만하다.
관련자료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奎 17464〉,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奎 666〉, 『영남읍지(嶺南邑誌)』〈奎 12173〉, 『영남읍지(嶺南邑誌)』〈奎 12174〉, 『남해읍지(南海邑誌)』〈奎 10880〉
집필자 김영인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
정의 : 1907년경에 편찬된 경상남도 남해군 읍지
원자료 제목
표제 : 慶尙南道南海郡邑誌
내제 : 慶尙南道南海郡邑誌
목차
001책
[地圖]
南海郡邑誌 : 慶尙南道南海郡邑誌[ 位置境界, 地勢, 沿革, 邑治, 山嶺, 河川, 島嶼, 人情風俗, 物産, 祀壇, 雩壇, 神祠, 烽臺, 鎭堡, 古蹟, 碑碣, 院宇, 烈女, 名䆠, 文章, 治蹟, 寺刹 ]
내용 및 특징
1907년경에 편찬된 경상남도 남해군 읍지이다.
편찬시기에 대한 단서는 본문의 연혁 기록 중에 ‘광무(光武) 11년’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본 읍지는 광무 11년, 즉 1907년에서 멀지 않은 시점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제의 ‘경상남도 남해군’이라는 표현은 19세기 말 지방제도 개편에 따른 것으로서, 기존의 남해현은 남해군이 되었으며 경상도가 남도와 북도로 분리되면서 남해군은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본 책은 필사본이며, 1책 12장으로 되어 있다. 본문 앞에 남해군의 채색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읍지는 위치경계(位置境界), 지세(地勢), 연혁(沿革), 읍치(邑治), 산령(山嶺), 하천(河川), 도서(島嶼), 인정풍속(人情風俗), 물산(物産), 사단(祀壇), 우단(雩壇), 신사(神祠), 봉대(烽臺), 진보(鎭堡), 고적(古蹟), 비갈(碑碣), 원우(院宇), 열녀(烈女) 명환(名䆠), 문장(文章), 치적(治蹟), 사찰(寺刹)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해군은 경상남도 동남단 하동부(河東府) 앞바다에 가로놓여 있으며,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다. 서남쪽으로는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돌산도(突山島), 서쪽으로는 전라도 광양군(光陽郡) 대인도(大仁島)에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곤양군(昆陽郡), 북동쪽으로는 사천현(泗川縣)과 고성부(固城府)에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대양(大洋)에 면해 있다. 면적은 남북으로 100리, 동서로 70리이다.
연혁 기록에 따르면 남해는 신라 신문왕 때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경덕왕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현종 때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공민왕대에 왜적에게 고을의 땅을 빼앗기는 일을 겪었다. 조선 태종대에 다시 해양현(海陽縣)을 설치하였으며, 얼마 후에 다시 남해현으로 칭하기 시작했다. 연산군 4년(1498) 현감(縣監)으로 강등되었다가 중종 2년(1507)에 다시 현령을 두었다. 고종 32년(1895)에 현령이 군수(郡守)로 바뀌었으며, 광무 11년(1907) 진주(晉州)의 창선면(昌善面)이 남해군으로 이속됨에 따라 남해군은 총 8면 185동이 되었다.
읍치의 이동에 대해서도 읍치 항목에 상세히 적어 놓았다. 삼동면(三東面), 남면(南面), 고현면(古縣面) 지역을 거쳐 망운산(望雲山) 아래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령 항목에는 광양군의 백운산(白雲山)에서 이어지는 망운산과 그로부터 뻗어 나온 원산(猿山), 삼봉산(三峰山), 녹두산(鹿頭山), 그리고 원산에서 이어지는 금산(錦山), 소흘산(所屹山)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하천 항목에서는 망운산에서 발원하는 심천(深川), 봉천(鳳川), 대천(大川), 금산에서 발원하는 동천(洞川), 원산에서 발원하는 장천(長川)에 대해 기록해 놓았다. 도서 항목에는 소도(蘇島), 장도(長島), 소치도(蘇峙島), 세존도(世尊島), 호도(虎島), 조도(鳥島), 갈도(葛島), 노도(櫓島) 등 남해군 소속 섬들의 위치와 특징 등이 상세히 적혀 있다.
남해 지역의 인정과 풍속에 대해서는, 농사와 길쌈을 숭상하고 예스럽고 질박함을 좋아하며 땅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곤궁하지 않다고 적어 놓았다. 남해의 물산으로는 각종 곡식과 과실, 약재, 해산물 등이 망라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해삼, 김, 미역, 굴, 대하, 조개, 게, 민어, 대구, 숭어, 조기, 문어, 낙지 등의 해산물이 역시 가장 많이 기재되어 있다.
남해군의 사단으로는 사직단(社稷壇), 성황단(城隍壇), 여제단(厲祭壇)이 있었고, 기우제를 지내는 우단으로는 제석당(帝釋堂), 병사당(兵使堂) 등이, 신사로는 성내와 금산 등지에 있는 칠신당(七神堂) 등이 있었다. 봉수대로는 소흘산봉수, 원산봉수, 금산봉수가 있었다. 진보 항목에는 수군첨절제영(水軍僉節制營)이 있던 미조항진(彌助項鎭)과 수군만호(水軍萬戶)가 관장하던 평산진(平山鎭)의 위치 및 석축의 규모, 전선 1척과 병선 2척, 사후선(伺候船) 1척이 있던 선소포(船所浦) 등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고적 항목에서는 금산에 대한 기록이 특히 주목된다. 금산은 원래 보광산(普光山)이라 불리던 곳으로,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가 이 산을 좋아하여 이곳에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고 하며,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왕이 되기 전 이 산에서 그가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부서(符瑞)를 얻어 이후 왕위에 오른 후 금산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러한 연유로 1903년(광무7)에는 금산에 소령전(昭靈殿)을 세워 태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인수전(仁壽殿)을 세워 대한제국 황실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
비갈 항목에는, 1598년(선조31) 남해의 관음포(觀音浦) 앞바다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이순신(李舜臣)을 기리며 세운 비각, 1599년(선조32) 명나라 장수 장양상(張良相)이 건립한 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 중종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김구(金絿)를 기리고자 세운 자암선생김구적려유허비(自庵先生金絿謫廬遺墟碑)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관련 인물들의 행적 및 비갈 건립과 관련된 사실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남해군의 원우로는 충렬사(忠烈祠), 봉천사(鳳川祠), 운곡서원(雲谷書院)이 있었다. 충렬사는 이순신의 위패를, 봉천사는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과 1721년(경종1) 신축옥사(辛丑獄事) 당시 남해로 유배되었던 이이명(李頤命)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며(읍지에는 이건명(李健命)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음), 운곡서원은 남해 출신의 유학자 정희보(鄭稀寶)를 제향하던 서원이다.
다음으로 지역 인물 관련 기록들이 나온다. 영조대에 정려(旌閭)를 받은 열녀 연대(蓮臺)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으며, 남해 출신으로 주요 관직을 역임한 대표적인 인물로 이충걸(李忠傑)과 이급(李伋), 대표적인 문장가로 유명규(柳明奎)가 소개되어 있다. 치적 항목은 역대 남해 수령들 가운데 특히 뛰어난 치적을 남긴 이들의 성명과 부임 및 체임 시기, 치적 및 특기사항 등을 기록해 놓은 부분이다. 선조대 박천기(朴天禥)부터 정조대 안윤복(安允福)까지 7인의 이름이 실려 있다.
마지막 사찰 항목에는 원산의 용문사(龍門寺), 망운산의 화방사(花芳寺) 등 주요 사찰들의 위치와 연혁 등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남해 읍지는 본 읍지 외에도 여러 종이 더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16세기 전반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輿地圖書)』 수록본, 18세기 후반 정조대에 편찬된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 1832년에 제작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1871년과 1895년에 제작된 『영남읍지(嶺南邑誌)』 수록본, 19세기 말에 나온 『남해읍지(南海邑誌)』 등을 꼽을 수 있다. 본 읍지의 체제와 구성은 다른 읍지들과 전혀 상이한 모습이며 기록된 내용 또한 많이 다르다. 대개 조선후기 지방 읍지들에서 중시되었던 사회경제적 부문과 관련된 내용은 모두 빠져 있으며,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들은 상대적으로 상세하다. 여타 남해 읍지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도 다수 담고 있다.
자료적 가치
본 읍지는 다양한 항목을 설정하여 20세기 초 남해군의 여러 사정들을 잘 전해주고 있다. 다른 남해 읍지 기록들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당시 남해 지역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자료이며, 일반적인 읍지들과는 전혀 다른 체제와 구성을 가진 읍지라는 점에서 읍지의 유형과 계통, 20세기 초 읍지의 특징과 변화를 연구하는 데에도 참고가 될 만하다.
참고문헌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솔, 1996), 『국역 여지도서』(디자인흐름, 2009), 『조선시대 읍지의 성격과 지리적 인식에 관한 연구』(양보경,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박사논문, 1987)
집필자 : 김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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