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지형과 지세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
상세내용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
분류 : 고서 - 지리서
역할: 편찬_남해현(南海縣)
간행지역 : 경상도 남해현 /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간행시기 : 연도(1786년경)
크기 : 세로(30.2) 가로(21.4)
판본 : 필사본
장정 : 오침선장(五針線裝)
수량 : 1책 10장
재질 : 표지_능화문황지(菱花紋黃紙), 본문_저지(楮紙)
표기문자 : 한자
인장정보 : 朝鮮總督府圖書之印 / 서울大學校圖書
표제어 : 남해현읍지(南海縣邑誌)
내용 : 1786년경에 편찬된 경상도 남해현 읍지이다.
남해현은 현재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창선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남해읍 서변리,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남해는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서 신라 신문왕이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현종대에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공민왕대에 왜적에게 땅을 빼앗김에 따라 치소(治所)를 임시로 진주(晉州)로 옮기게 되었다. 조선 태종대에 하동(河東)과 병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 칭하다가, 후에 하동현을 복설한 뒤 진주 금양부곡(金陽部曲)을 이속시켜 해양현(海陽縣)이라 일컬었다. 얼마 후 금양부곡을 진주로 환속시키고 다시 남해라 칭하였다. 세종대에 곤명현(昆明縣)과 합쳤다가 다시 분리하고 현령을 두어 다스렸다. 남해현은 19세기 말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남해군이 되었으며, 경상도가 남도와 북도로 분리되면서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1907년 진주의 창선면(昌善面)이 남해군으로 편입되었다.
본 읍지는 다양한 항목을 설정하여 18세기 후반 남해현의 여러 면모들을 잘 전해주고 있다. 읍지에 기록된 호구와 전결의 수로 미루어 볼 때 남해현은 조선후기 지방 고을들 가운데 규모가 비교적 작은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해현은 동쪽으로 진주(晉州), 서쪽으로 순천(順天), 북쪽으로 곤양(昆陽)과 접해 있었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1,035리였다.
본 읍지를 통해 남해현 소속 면리들의 이름과 위치를 비롯해, 소재 읍성, 형승, 산천, 사우, 관청, 창고, 역원, 관방, 봉수, 사찰, 고적, 진보, 토산물, 지역 인물 관련 정보 등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고을의 호구수와 토지결수, 조세 내역 및 재정 관련 사항 등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남해 읍지는 현재 여러 종이 전해지고 있다. 본 읍지의 체제와 구성은 18세기 이후에 나온 지방 읍지들과 유사하며, 분량은 많지 않지만 기록은 전체적으로 충실한 편이다. 이전이나 이후에 제작된 남해 읍지들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다른 읍지 기록들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조선후기 남해 지역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자료이다.
관련자료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奎 666〉, 『영남읍지(嶺南邑誌)』〈奎 12173〉, 『영남읍지(嶺南邑誌)』〈奎 12174〉,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奎 10875〉, 『남해읍지(南海邑誌)』〈奎 10880〉
정의 : 1786년경에 편찬된 경상도 남해현 읍지
원자료 제목
표제 : 南海縣邑誌 全
목차 : 001책
南海縣邑誌 : 坊里, 道路, 建置沿革, 郡名, 形勝, 城池, 官職, 山川, 姓氏, 風俗, 陵寢, 壇廟, 公廨, 堤堰, 倉庫, 物産, 驛院, 橋梁, 牧場, 關阨, 烽燧, 樓亭, 題詠, 寺刹, 古蹟, 鎭堡, 人物, 旱田, 水田, 進貢, 糶糴, 田稅, 大同, 均稅, 俸廩, 軍兵, 先生案
내용 및 특징 : 1786년경에 편찬된 경상도 남해현 읍지이다.
편찬시기에 대한 단서는 선생안 항목에서 찾을 수 있다. 마지막에 이신경(李身敬)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을사년(乙巳年) 9월에 남해 수령으로 부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관련 기록을 찾아보면 이신경이 수령으로 있던 시기는 1785년(정조9)~1786년(정조10)이다. 따라서 기록의 을사년은 1785년임을 알 수 있으며, 앞에 수록된 인물들과 달리 이신경의 경우 부임 시기 외에 체임 시기가 적혀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본 읍지는 그가 수령으로 재직할 당시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규장각에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읍지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는데 대개 본 읍지와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본 책은 필사본이며, 1책 10장으로 되어 있다.
읍지는 방리(坊里), 도로(道路),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형승(形勝), 성지(城池), 관직(官職), 산천(山川), 성씨(姓氏), 풍속(風俗), 능침(陵寢), 단묘(壇廟), 공해(公廨), 제언(堤堰), 창고(倉庫), 물산(物産), 역원(驛院), 교량(橋梁), 목장(牧場), 관애(關阨), 봉수(烽燧), 누정(樓亭), 제영(題詠), 사찰(寺刹), 고적(古蹟), 진보(鎭堡), 인물(人物), 한전(旱田), 수전(水田), 진공(進貢), 조적(糶糴), 전세(田稅), 대동(大同), 균세(均稅), 봉름(俸廩), 군병(軍兵), 선생안(邑先案)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해현은 진주진관(晉州鎭管) 소속으로, 방리 항목에 따르면 현내면(縣內面), 이동면(二東面), 삼동면(三東面), 남면(南面), 서면(西面), 고현면(古縣面), 설천면(雪天面)의 7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읍지에는 각 면별로 소속 리(里)들의 이름과 관문(官門)으로부터의 거리가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방리 항목 끝부분에 남해현의 호구수가 적혀 있다. 병오년(丙午年: 1786년) 호적을 기준으로 원호(元戶)가 4,904호, 인구가 25,791구였고, 그 가운데 남자가 12,326구, 여자가 13,465구였다. 끝에 남해현의 장시(場市) 정보도 부기되어 있는데, 읍성 안에 위치하였으며 개시일이 4일과 9일인 5일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 항목에 따르면, 남해현은 관문을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진주(晉州) 창선목(昌善牧) 경계까지는 육로 30리에 수로 1리, 서쪽으로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경계까지는 육로 20리에 수로 20리, 남쪽으로 전라도 좌수영(左水營) 경계까지는 육로 25리에 수로 20리, 북쪽으로 곤양군(昆陽郡) 경계까지는 육로 37리에 수로 2리를 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남해현과 서울과의 거리는 1,035리, 북쪽 감영(監營)과의 거리는 400리였다.
건치연혁 기록에 따르면, 남해는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서 신라 신문왕이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현종대에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공민왕대에 왜적에게 땅을 빼앗김에 따라 치소(治所)를 임시로 진주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로 옮겼다. 조선 태종대에 하동(河東)과 병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 칭하다가, 후에 하동현을 복설한 뒤 진주 금양부곡(金陽部曲)을 이속시켜 해양현(海陽縣)이라 일컬었다. 얼마 후 금양부곡을 진주로 환속시키고 다시 남해라 칭하였다. 세종대에 곤명현(昆明縣)과 합쳤다가 다시 분리하고 현령을 두어 다스렸다. 연산군 4년(1498) 현감(縣監)으로 강등되었다가 중종 2년(1507)에 다시 현령을 두었다.
군명 항목에는 앞서 건치연혁에 나오는 이름들 외에 남해현의 별호로서 전산(轉山), 윤산(輪山), 화전(花田)이 소개되어 있다. 형승 항목에는 현 동쪽의 금산(錦山)에 대한 정보와 함께 ‘하늘 남쪽의 훌륭한 땅[天南勝地]’이라는 글귀가 수록되어 있다. 이 글귀는 남해현성이 축조된 후 정이오(鄭以吾)가 쓴 기문(記文) 가운데 나오는 구절로서, 성지 항목에 해당 기문의 전문이 실려 있다. 관직 항목에 따르면 남해현령에는 무관(武官) 종5품이 임명되었다.
산천 항목에는 고을의 진산(鎭山)인 망운산(望雲山)과 그로부터 발원하여 동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대천(大川) 등에 대한 정보가 실려 있다. 단묘 항목 중에는 남해의 노량 앞바다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이순신(李舜臣)의 위패를 봉안한 충렬사(忠烈祠)가, 창고 항목 중에는 선소(船所)에 있던 선가고(船價庫)와 현 북쪽 노량(露梁)에 위치하였던 조창(漕倉)이 특히 눈에 띈다. 물산 항목에 기록된 남해 지역의 토산물로는 문어, 오징어, 전복, 조개, 상어, 조기, 숭어, 홍어, 해삼 등 해산물이 역시 주를 이루고 있다.
남해현은 조선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던 만큼 관련 항목들이 주목된다. 관애 항목에는 현 북쪽의 노량진(露梁津), 동쪽의 지족암진(只簇巖津), 선소(船所), 서쪽의 호포진(湖浦津)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노량진과 지족암진에는 각 배 한 척씩이 있었고, 선소에는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이 있었다. 진보 항목에는 미조항진(彌助項鎭)과 평산포보(平山浦堡)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석축의 둘레와 높이, 첨사(僉使), 군관(軍官) 등 소속 관리, 보유한 배와 군사의 숫자 등이 상세히 적혀 있다.
제영 항목은 남해 지역과 관련해 조선의 문인들이 남긴 시문들을 수록해 놓은 것이다. 송시열(宋時烈)이 이순신을 기리며 쓴 「충무공비명(忠武公碑銘)」, 중종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김구(金絿)를 기리는 「자암비명(自庵碑銘)」이 포함되어 있다. 인물 항목은 다른 지역 읍지들에 비해 많이 소략한 편으로, 효녀 1인과 열녀 2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남해현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기록이 담긴 항목들이 나온다. 남해현의 전체 토지 가운데 한전(旱田)은 원장부상 1,422결(結) 39부(負) 2속(束)으로 그 중 을사년(乙巳年: 1785년) 당시 경작중인 토지는 1,042결 96부였고, 수전(水田)은 원장부상 1,510결 86부 1속으로 을사년 당시 경작중인 토지는 1,287결 97부 2속이었다. 진공 물품으로는 맥문동(麥門冬), 복신(茯神), 전복, 유자, 문어, 미역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봉름 항목 등을 통해서는 남해현의 조세 내역 및 재정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군병 항목에는 남해현에 배정된 군관 및 보인(保人)의 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읍지 마지막에 수록된 선생안 항목은 역대 남해 수령을 지낸 인물들의 명단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서두에 1598년(선조31) 이전의 기록은 병란으로 소실되었다고 적혀 있다. 1598년(선조31) 현령으로 부임했던 이종일(李宗一)부터 1785년(정조9)에 부임한 이신경까지 120여 명의 성명과 부임 및 체임 시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남해 읍지는 본 읍지 외에도 몇 종이 더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16세기 전반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輿地圖書)』 수록본, 1832년에 제작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1871년과 1895년에 제작된 『영남읍지(嶺南邑誌)』 수록본, 19세기 말의 『남해읍지(南海邑誌)』, 20세기 초의 『남해군읍지(南海郡邑誌)』 등을 꼽을 수 있다. 본 읍지의 체제와 구성은 기본적으로 18세기 이후에 나온 지방 읍지들과 유사하다. 이 시기 읍지들은 이전에 나온 읍지들에 비해 사회경제적인 부문과 관련된 기록이 한층 풍부해진 것이 특징인데, 본 읍지 역시 이 같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자료적 가치
본 읍지는 다양한 항목을 설정하여 18세기 후반 남해현의 여러 사정들을 잘 전해주고 있다. 이전이나 이후에 제작된 남해 읍지들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다른 읍지 기록들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조선후기 남해 지역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솔, 1996), 『국역 여지도서』(디자인흐름, 2009), 『조선시대 읍지의 성격과 지리적 인식에 관한 연구』(양보경,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박사논문, 1987)
집필자 : 김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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